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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111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진실. (격동의 한반도)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요.. 승리한 나라의 입장에서 자기들이 패망시킨 나라의 마지막왕은 언제나 폭군이거나, 주색을 밝혀 나라와 백성을 고통에 빠뜨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당 부분 맞는 이야기인 경우도 많지만 백제의 의자왕은 너무 많은 이야기가 부풀려지고 왜곡되어 버린 경우인데요. 특히나 삼천 명의 궁녀를 거느릴 만큼 여색을 밝혔다거나.. 나당 연합군에 패배하였을 때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꽃과 같이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는 소설에 가깝다고 해요.. 삼천 명의 궁녀부터 불가능한 숫자입니다. 조선시대에도 궁녀가 가장 많이 있었을 때가 500 명 수준이었으니 백제에 삼천 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삼천 명의 궁녀가 절개를 지키기 위해 낙화..

안시성 전투! 양만춘,이세민 그리고 연개소문

양만춘과 연개소문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꼭두각시 보장왕을 세운 다음 스스로 '대막리지'라는 자리를 만들어 고구려를 손에 넣었을 때... 대부분의 군벌세력은 연개소문을 지지하였지만 안시성주 양만춘은 달랐습니다. 양문춘은 왕을 죽이며 반역을 저지른 연개소문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고 연개소문은 이런 양만춘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안시성으로 군사를 몰고 가 공격하기도 했는데요.. 양만춘이라는 명장이 지키고 있는 천해의 요새 안시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하고 그대로 군대를 돌려 평양성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후로도 양만춘과 연개소문은 정적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는데요.. 그렇게 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보장왕 4년! 당나라 이세민은 고구려 침공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당태종 이세민의 출정 당나라 입장..

연개소문 과 영류왕 ( Feat 드라마 칼과 꽃 )

고구려와 당나라의 상황 당나라에서 이세민이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이고 왕권을 차지했을 때 고구려의 왕은 영류왕이었습니다. 당고조 이연과 뒤를 이은 이세민은 나라를 세우고 내부의 세력들을 잠재우느라 힘을 많이 소비한 입장에서 한동안 외부의 적들과의 전쟁은 자재를 했는데요.. 당나라는 고구려와도 부딪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원정하려고 했다가 곤죽이 되도록 처맞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요.. 고구려의 입장에서도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피해를 많이 본 상황에서 당나라가 바로 다시 쳐들어 오는 것만은 막아야 했기 때문에 당나라와 교섭에 나서는데요.. 이렇게 당나라와 고구려는 조공책봉 관계를 맺습니다. 당나라는 고구려 영류왕을 책봉하고 고구려는 당나라에 조공을 보내는 선에서 관계를 정..

당나라의 등장과 당태종 이세민

당나라를 세운 이연 수나라 양제는 무리하게 고구려와의 전쟁을 일으키고 살수에서 대패를 당하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이후에도 정신 못 차리고 방탕한 생황을 이어 나갔고요. 대운하를 건설하는등 무리한 토목공사를 시도하면서 나라는 점점 피해져 갔습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나라가 이쯤 되면 중국은 다시 여기저기서 '힘들어 못살겠다'며 반란을 일으키고는 했는데요.. 수나라 말에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이 반란 세력들 중 가장 힘이 센 사람은 수나라 관리 중 한 사람이었던 이연이였습니다. 이연이 이끄는 쿠데타 세력은 빠르게 수나라 군대를 물리치며 수도로 진입했고.. 617년 드디어 수나라 양제를 끌어내린 후 그의 손자를 허수아비 왕으로 앉혀놓게 되는데요.. 바로 다음해 618년 수나라 양제가 암살을 당하자..

을지문덕, 살수대첩. 수나라 고구려 전쟁 2.

수양제의 침입 수나라 문제는 더 이상 고구려를 쳐들어오지 않았지만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양제는 달랐습니다. 문제의 둘째 아들인 양재는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는데요.. 그는 즉위에 오르자 마자 고구려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고 일을 벌였습니다. 아무래도 무리하게 왕권을 찬탈했으니 관심을 외부로 돌려야 했겠지요.. 양제는 이전보더 더 많은 군사를 모으고 어머어마한 양의 전쟁 물자를 준비했구요 612년 급기야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이번 전쟁에 참여한 수나라 군의 수는 113만이 넘었다고 하고요..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요하를 지키던 고구려 군대가 밀리고 말았습니다 수나라 군대는 요동성까지 쳐들어왔는데요.. 수나라 군대가 요동성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요동성의 장군은.. 성 밖..

수나라 고구려 전쟁 1. 수문제의 침입

수나라 등장이요~ 360년간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의 시기를 수나라의 양견이 마무리하며 중국이 다시 한번 통일왕조를 이룬 서기 589년.. 한반도에서는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유역을 나누어 가진 뒤.. 다시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를 공격해 한강유역을 모두 차지한 지 30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사실 고구려가 강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었기 때문이었는데요... 수나라의 등장으로 고구려에는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선비족 출신으로 수나라를 일으켜 중국을 통일한 수문제 양견은 우선 북방의 돌궐 족의 힘을 약화시켜야 했는데요.. 수문제는 돌궐 내부에 첩자를 심어 내분을 일으키려는 간첩작전을 썼고 이작전이 먹혀들면서 돌궐은 둘로 나누어지게 됩..

초한지, 삼국지, 뮬란.. 분열된 중국 (위진남북조, 5호16국 ).

혼란한 중국 대륙 진시황의 진나라가 잠깐 만들어졌다 저물고.. 뒤를 이어 혼란에 빠진 중국은 수많은 세력들이 난립을 하면서 싸우게 되는데요.. 이 혼란에서 살아남은 두명의 영웅이 바로 장기의 기원이 된 초한지의 항우와 유방입니다. 결국 유방의 승리로 한나라가 세워지는데요 이 시기 중국 동북쪽 연나라에서 동쪽으로 도망친 위만은 고조선에 의탁해 있다 배반하여 고조선을 손에 넣게 됩니다. 이때가 위만조선이라 불리는 시기이고 이후 위만의 손자 우왕 때 한나라에 의해 고조선은 멸망하게 됩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한나라는 200년 동인 지속되다 서양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시절 섭정이었던 왕명이 신라라에 의해 잠시 망했다고 한번 망하고 다시 일어서는데요 그 이전을 전한 (BC 202 - AD 8) 이후를 후한 (A..

백제금동대향로.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세계의 유물.

세기의 발견. 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 고분 관람객용 주차장 공사 예정지.. 공사를 앞두고 일부 구역에서 실시한 매장 문화재 조사 결과 특별한 유물은 없는 것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화재 발굴단은 이곳에서 깨진 기와가 많이 출되었다는데에 주목을 했고 중요한 시설물들이 있었을 수도 있으니 조사구역을 넓혀 다시한번 조사해 보기로 하는데요 문화재 관리국의 허가를 얻어 힘겹게 다시 마지막 조사을 사작힌지 며칠 후 진흙구덩이 에서 모습을 들어낸 유물... 찬란한 백제 문화의 발견의 시작이였습니다. 음(음) 을 상징하며 물의 수호신인 '용..' 불교의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연꽃 !! 신선들과 신비한 동물이 뛰노는 도교의 천상세계 '산봉우리' 그리고 그 꼭대기에서 날아오르는 양의 상징 '봉황' 높이 61...

진흥왕의 관산성 전투. 신라 전성기의 시작.

진흥항 시기 국제 정세 신라는 법흥왕 때 윤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왕권을 튼튼하게 세웠는데요.. 법흥왕이 잘 닦아놓은 왕권을 물려받는 것은 바로 진흥왕이었습니다. 진흥왕 시기는 고구려는 장수왕의 시대를 지나고 그의 손자 문자왕의 시대를 거치며 점점 내부에서 문제가 커져가고 있었는데요.. 고구려는 사실 한반도 세력인 한민족과 , 요 등 세력인 말갈족 등등 다양한 민족이 한데 모여 나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부족 간이 갈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시기 왕위를 둘러싸고 왕과 귀족들 사이에서 싸움이 크게 일어나 나라가 어수선한 분위기였던 것이었지요.. 여기에 설상가상 북쪽에 북제와 돌궐 또한 고구려를 공격해 오는 상황이라 고구려는 내외 부적으로 큰 위기에 처해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백제는 ..

신라의 성장. 지증왕 , 법흥왕과 이차돈.

신라의 성장 지증왕. 신라를 신라로.. 신라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은 22대 지증왕 때부터였습니다. 이 시기 고구려는 이미 장수왕이 백제 개로왕을 죽이고 한강유역을 손에 넣은 상황이었고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도망친 때였으니 신라의 성장이 다소 늦은 감이 있죠.. 지증왕 때부터 마립간이라는 호칭에서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는 걸 보면 알 수 이듯이 왕권이 제대로 확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소를 이용해서 밭을 가는 방법도 지증왕이 백성들에게 퍼트린 방법이라고 해요.. 사람 대신 소가 밭을 갈기 시작하니 농사짓지가 훨씬 쉬워졌고 수확량도 크게 늘어나게 되었죠.. 지방의 생산량이 늘어나자 지증왕은 각 지역마다 직접 관리를 파견했는데요.. 각 지역의 주요 사건들을 왕이 직접 알고 결정함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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