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한국사 아는척하기 ( 이땅의 사람들)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진실. (격동의 한반도)

기차타고시베리아 2022. 5. 28.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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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요..

승리한 나라의 입장에서 자기들이 패망시킨 나라의 마지막왕은 언제나 폭군이거나,
주색을 밝혀 나라와 백성을 고통에 빠뜨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당 부분 맞는 이야기인 경우도 많지만 백제의 의자왕은 너무 많은 이야기가 부풀려지고
왜곡되어 버린 경우인데요.

초상화
의자왕 초상


특히나 삼천 명의 궁녀를 거느릴 만큼 여색을 밝혔다거나.. 나당 연합군에 패배하였을 때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꽃과 같이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는 소설에 가깝다고 해요..

삼천 명의 궁녀부터 불가능한 숫자입니다. 조선시대에도 궁녀가 가장 많이 있었을
때가 500 명 수준이었으니 백제에 삼천 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삼천 명의 궁녀가 절개를 지키기 위해 낙화암에서 뛰어내려 모두 자결했다는 것도
근거 없는 가짜 뉴스입니다.

낙화암
낙화암


여색을 밝히고 방탕한 생황을 하면서 충신을 쫓아내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결국 나라를 망하게 만든 나쁜 왕으로만 알려져 있는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

오히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의자왕은 백제 무왕의 맏아들로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력을 가지고 있었었다고 하고 효심도 깊었던 것으로 쓰여 있습니다.

의자왕의 이름은 그냥 그대로 의자(義慈)입니다 의롭고 자애롭다는 뜻인데요..

의자왕이 죽고 백제가 망했기 때문에 이후에 다른 이름을 붙여줄 후손이 없어 시호 없이
그냥 이름 뒤에 왕을 붙여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의자왕의 신라 공격



의자가 왕이 된 후, 의자왕의 목표는 신라에 대한 선조 성왕의 복수였습니다.

성왕은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 백제의 중흥을 이끈 왕이었는데요.. 신라의 진흥왕과
손잡고 고구려를 한강 이북으로 몰아냈지만...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 전역을 신라에게 내줘야만 했습니다.

지도
관산성 ( 지금의 옥천)


배신감과 복수심에 불탄 성왕은 신라 공격에 나섰지만 관상 성에서 전투에서 그만 패배하였고
심복의 손에 목이 배어져 그의 목은 신라로 보내지게 됩니다.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 성왕의 목을 경주의 관청 문 앞에 묻어 신라 사람들에 이 관청에 드나들 때
성왕의 머리를 밝고 다니게 했는데요..

성왕
KBS 역사저널 그날 관산성의 비극 편


백제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며 신라는 반드시 복수해야 하는 대상이 되어 버렸는데요
그리고 왕이 5번이나 바뀐 후 의자왕이 642년 신라 공격에 나거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642년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고구려를 장악하고 있었을 때였고 당나라는
이세민이 집권하여 고구려를 손봐 주려고 하고 있었던 때였는데요..

백제는 당나라와 고구려 모두 신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때 신사를 공격해 들어간 것이었고
의자왕이 직접 인솔한 백제군은 신라의 40여 개 성을 빼앗으며 신라를 위기에 몰아넣어 버립니다.

지도
대야성 ( 지금의 합천 )

이후 의자왕은 윤충에서 군사를 내어주고 신라 수도 경주를 공격하기 위해 반드시 차지해야만
하는 군사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하게 합니다.

대야성은 안에서 문을 열지 않으면 절대 공략해 줄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방어에 유리한
요새였는데요.. 윤충은 과거 대야성주에게 아내를 뺏긴 관리를 이용하여 대야성 공격에 성공합니다



윤충은 대야성주와 그의 아내의 목을 베어 의자왕에게 보냈고.. 의자왕은 이을 감옥 바닥에
묻어 죄수들이 이들의 머리를 발고 다니게 했는데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였던 것 있지요..

이 대야 성주의 아내가 바로 나중에 신라의 왕이 되는 김춘추의 딸이었고 김춘추는 크게
충격을 받게 됩니다..

백제 의자왕의 신라 공격과, 딸을 잃은 슬픔에 빠진 김춘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연개소문..
동북아의 정세는 이제 격동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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