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한국사 아는척하기 ( 이땅의 사람들)

신라의 성장. 지증왕 , 법흥왕과 이차돈.

기차타고시베리아 2022. 3. 6.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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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성장

지증왕. 신라를 신라로..



신라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은 22대 지증왕 때부터였습니다.

이 시기 고구려는 이미 장수왕이 백제 개로왕을 죽이고 한강유역을 손에 넣은 상황이었고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도망친 때였으니 신라의 성장이 다소 늦은 감이 있죠..

드라마속 지증왕


지증왕 때부터 마립간이라는 호칭에서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는 걸 보면 알 수 이듯이
왕권이 제대로 확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소를 이용해서 밭을 가는 방법도 지증왕이 백성들에게 퍼트린 방법이라고 해요..
사람 대신 소가 밭을 갈기 시작하니 농사짓지가 훨씬 쉬워졌고 수확량도 크게 늘어나게 되었죠..


지방의 생산량이 늘어나자 지증왕은 각 지역마다 직접 관리를 파견했는데요.. 각 지역의 주요
사건들을 왕이 직접 알고 결정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지증왕은 몸집이 아주 아주 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지증왕과 어울리는 신붓감을 찾을 수
없어서 신부를 찾으라 다니는 이야기도 유명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나타난 것도 왕의 힘을 더 커 보이려고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나라가 안정이 되자 지증왕은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고요..

신라라는 국호도 지증왕 때부터 였습니다.

신라는 이전에는 서라벌, 사로, 사라 등 여려 이름으로 불렸지만 지증왕이 '신라'라고 부르라고
못을 박은 것이었는데요..

신 () 은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것이고.. 라 () 사방에 고르게 미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법흥왕과 이차돈




지증왕의 뒤를 이은 것은 법흥왕이었는데요. 법흥왕은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왕실의 권위를
더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법흥왕은 여러 정책을 시행했는데요. 가장 주목한 것이 바로 율령을 반포한 일입니다.
신라는 23대 법흥왕 시대에 와서야 국가 주도로 율령을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드라마속 법흥왕 / 채널A 천일야화 화면 캡쳐

율령을 발표했기 때문에 '법흥왕'이 라고 불리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법흥왕에서
'법'은 불교의 율법을 의미한다고 해요..

즉 법흥왕의 의미는 율령을 반포한 왕이 아니라 불교를 흥하게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법흥왕은 고구려나 백제처럼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는데요.. 지역마다 다른 신을
섬기고 있던 신라에서는 귀족들의 반대가 너무 심해 이을 이룰 수 없었는데요..

법흥왕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싶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왕을 찾아온 젊은 신하가 있었으니
이 사람의 이름이 바로 '이차돈' 이었습니다.

법흥왕과 이차돈 / KBS 역사스페셜 화면 캡쳐


이차돈은 신라 백성들에게 불교를 널리 퍼트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이차돈은 법흥왕에게 자신이 천경림에 절을 지으면 귀족들이 분명 거세가 반발을 할 테니
그러면 자신의 목을 베라고 요청합니다.

천경림은 귀족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숲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절을 세운다는
것은 귀족들이 절대 용서할 수 없었던 일이었는데요..





법흥왕은 이차돈의 끈질긴 요청에 못 이겨 결국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이차돈이 천경림의 나무를 베기 시작했고 놀란 귀족들이 달려가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묻자 이차돈은 '왕이 이곳에 절을 지으라고 시켰다'라고 말하는데요..

귀족들은 바로 왕에게 달려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따지자.. 법흥왕은 이차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며 그를 잡아오게 합니다.

경주 천경림 흥륜사 대웅전 / 이차돈 순교지



왕의 앞에 끌려온 이차돈은 '사실 왕께서 절을 지으라고 명령을 내린 적이 없소'라고하며
'내가 죽는 순간 부처님께서 신비한 일을 보여주실 것이오'라는 이상한 말을 합니다..

이후 왕은 이차돈의 목을 베었는데요.. 이차돈의 몸에서 우유처럼 흰 피가 솟구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이을 본 귀족들은 더 이상 불교에 반대할 수 없었고 법흥왕은 불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죠..

아치돈 순교비 / 300 년후 현덕왕 시절 제작됨.



사실 이차돈이 순교 이야기는 후세에서 만들어낸 전설이라고 하는데요..
법흥왕과 이차돈 사이에 정치적인 밀약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던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왕권을 강화한 법흥왕은 이전부터 왕과 귀족들이
중요한 일을 결정하던 화백회의에도 참석하지 않고..

상대등이라는 벼슬을 만들어 화백회의를 이끌게 했습니다.
이제 겸상하지 않겠다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신라의 힘이 커지자 532년 금관가야이 구해왕이 자기 나라를 신라에 바쳤는데요..
덕분에 신라의 영토는 낙동강 유역까지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한 김춘추가 바로 이 금관가야의 왕족의 출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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