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한국사 아는척하기 ( 이땅의 사람들)

무령왕릉의 의미와 미스터리.. 공주 여행전 알고가기~

기차타고시베리아 2022. 3. 5. 08:37
반응형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

백제 웅진시대 무령왕


많은 학생들과 가족들이 공주를 여행할 때 빼놓지 않고 들리는 곳이 있는데요..
바로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 고분군의 무령왕릉입니다.

공주 송산리는 금성동과 웅진의 경계에 있는 지역의 옛 이름으로 여기에는 백제 웅진시대
왕과 왕족들의 무덤인 고분들이 있는데요..

현재는 무령왕의 능과 함께 1호분 에서 6호분까지 복원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무령왕은 고구려 장수왕에서 목숨을 잃은 개로왕의 아들로 아버지를 죽인 고구려군을 피해
웅진. 지금의 공주로 도망쳐 문주왕의 이후 4대가 지난후의 왕입니다.

문주왕과 뒤이은 삼근왕, 동성왕이 모두 귀족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이후 왕위에 오른 것이
바로 무령왕인데요. 그만큼 백제는 위태로웠고 왕은 귀족들의 손에 휘둘리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무령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을 구휼하였으며 전국에 22 담로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해
점점 힘을 키워나가게 됩니다.




이후 성왕 때에 이르러서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할 만큼 힘을 되찾기도 하는데요..
성왕이 수도를 다시 사비( 지금의 부여)로 옮기면서 백제의 짧은 웅진시대는 끝이 나게 됩니다.

백제에 있어서 웅진시대는 고구려에 의해 약해진 힘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인데요..
그 중심에 바로 무령왕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5,6호 고분의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었는데요,,

축조 연대와 피장자가 분명하고 부장품이 고스란히 발견되어 삼국시대 구문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당시 중국은 삼국지의 시대가 끝나고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던 남북조 시대였는데요..
무령왕릉은 남조에서 유행했던 벽돌무덤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무령왕을 발굴에서 중요했던 것은 바로 지석의 출현인데요. 지석이란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판석이나 도판을 말합니다.

바닥에 깔려있는 지석와 지석 내용


무령왕릉의 지석 앞면에는 "영동대 장군인 백제 사마 왕이 나이 62세 되는 계묘년 (523년) 5월
돌아가셨다.. "라고 쓰여있었는데요.. 사마 왕은 무령왕의 어릴 적 이름입니다

무령왕릉에서 지석이 나옴으로써 백제 송산리 고분은 정확한 피장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 당시 정치사와 매장 풍습 및 매지권 관련 내용이 밝혀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무덤 주인이 밝혀진 삼국시대 왕릉으로는 무령왕릉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발굴전 한 번도 도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중한 유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이에
백제의 문화화 삶을 알아낼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웅진백제의 마스코트로 알려져 있는 진묘수도 무령왕릉에서 발굴이 되었는데요..
진묘수는 죽은 사람의 공간을 지키는 특별한 존재가 필요하다는 믿음으로 만든 신상입니다.

이 진묘수를 넣은 것도 중국의 남북조시대 남조의 매장 양식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요..
딱히 어떤 동물을 닮았다고 할 수 없는 신묘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날림 발굴과 미스터리


1971년 7월 장마철 폭우로 조사가 완료된 무덤들의 손상을 막기 위해 배수로 공사가 한창이였데요.
송산리 6호분 인근을 공사하던 인부의 삽자루 끝에 무언 거 딱딱한 물건이 닿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조금씩 파내려 가자 예사롭지 않은 벽돌벽이 모습을 드러냈고 사람들인 이것이
예사롭지 않다고 한 번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공사는 중단되고 긴급조사단이 꾸려졌고 조사단에 의해 마침내 벽돌벽 전체가 모습을
들어냈는데요..

하지만 왕의 무덤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리듯. 하늘에서는 다시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해
조사단의 작업은 중단됐고 계획된 야간작업도 취소되었습니다.

비가 그치고 발굴은 다시 시작되었는데요 입구를 단단히 막고 있던 벽돌을 어렵게 제거하자
1500년의 암흑을 깨고 왕의 무덤이 세상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희대의 발견은 바로 전국으로 전파를 타고 퍼져나갔고 무덤 주위에는 바로 많은 구경꾼들과
신문기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늦게 도착해 발굴 시작을 보지못했던 신문사의 간부는 도착하자마자 발굴단장의 빰을
후려치기도 했다고 하고..

너도나도 먼저 고분 안을 보려고 달려들었고 심지어 조사단 보다도 기자들이 고분 안에 들어서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발굴 현장이 갈수록 혼란스러워 지자 발굴단장은 결국 철야도 발굴을 끝내기로 결정하는데요

소중하게 시간을 두고 발굴되어야 할 백제왕의 무덤은 이렇게 17시간 만에 급하게 완료되었고
왕릉은 크게 훼손 되었습니다.

아직 까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는 처음 왕릉을 발굴했을 당시에도 무덤 안에 유물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고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는 것인데요..


아무도 열지 않았던 무덤이 안에서 유물들이 왜 제자리에 있지 않고 흩어져 있었는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했지만...

이제 영원히 그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기회는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엉터리 날림 발굴로 인해서 발굴 당시에는 유골을 발견하지 못하였는데요..
40여 년이 지난 2009 년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 조작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외부에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탄소 연대 측정도 어렵고 DNA 분석도
어려워졌다고 해요..

이 뼛조각이 정말 백제인인 무령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증명할 기회도 60년 전 날림 발굴이
날려버린 거였습니다.

무령왕릉의 날림 발굴은 우리나라 고고학계가 두고두고 가슴 아파하는 부분이라고 하는데요..
이를 거울 삼아 다시는 이러한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되야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