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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111

해동성국 발해! 바다 동쪽의 번성한 나라~

발해 무왕 698년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진이라는 나라를 건국하였고 713년 당나라도 이를 인정하고 대조영에게 '발해군왕'이라는 칭호를 주었는데요.. 이때부터 발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당나라 입장에서도 발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이유는 바로 요서지방의 돌궐이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돌궐에게 대조영은 손을 내밀었고 당나라는 돌궐과 발해가 힘을 합치는 꼴은 볼 수가 없으니 발해와 더 이상 각을 세우려 하지 않은 것이지요.. 대조영이 세상을 떠나자 맏아들 대무예가 두 번째 왕이 되었으니 바로 무왕입니다. 무왕은 당연히 무력을 주변을 정복하고 영토를 드넓힌 왕이 되시겠는데요.. 무왕은 왕이 되자 발해 북쪽의 흑수말갈을 공격하여 북쪽의 안정을..

대조영! 발해 건국의 과정. 고구려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 디아스포라 668년 고구의 평양성이 당나라에게 함락당하면서 고구려는 대부분의 땅을 당나라에게 빼앗기게 되었으며 수많은 고구려 귀족들과 백성들은 당나라로 끌러가게 되었습니다. 당나라 입장에서는 고구려 유민들이 한 곳에 뭉쳐 있으면 언제 다시 뭉쳐 일어나 당나라에 맞설 수도 있는 상황기 때문이었는데요.. 수많은 고구려인들이 고향에서 떠나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상황은 수천 년간 살아온 땅에서 로마에 의해 흩여져야 했던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를 생각나게도 하는데요. 이때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이 수십만에 이르렀고 발해의 시작은 바로 이 고구려 유민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고구려 유민은 아주 먼 중국 서쪽 간쑤 성이나 양자강 남쪽의 황폐한 땅으로 끌려 갔고 일부는 옛 고구려 땅에서 ..

신라사람 장보고 이야기 (궁복, 청해진 대사,해신)

당나라로 떠는 궁복 초기 신라에서 통일 이후 중대 하대 신라까지 이어진 신라의 독특한 신분제도가 바로 골품제도인데요.. 이러한 신분제도 때문에 중앙의 지배층 이외에 지방 사람들은 중앙 정치에 참여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신라가 작은 나라였을 때 만들어진 골품제도는 몇 배나 커진 통일신라에 그대로 적용 되기는 문제가 많았는데요...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도 중앙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은 점점 불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꿈을 펼치기 위해 외국인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신분에 상관없이 대우를 해주는 당나라로 넘어갔는데요.. 그중에는 활을 잘 쏘는 공복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신라에서는 왕족이나 귀족 말고는 성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평..

왕오천축국전!! 신라 혜초 스님의 세계여행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 왕(往: 다녀오다) 오 (五: 다섯 개) 천축국 (天竺國 ; 인도 중동의 있던 5개 나라) 전(傳이야기) 다섯 개 천축국을 다녀온 이야기.. 지은이 신라의 혜초(慧超) 스님!! 왕오천축국전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중국 당나라 현장의 대당서역기, 14세기 모로코 출신 이븐바투타 의 라훌라 (Rihla)와 함께.. 세계 4대 고대 여행기로 꼽힙니다. 혜초는 신라 성덕왕 시대의 승려로 중국에서 만난 인도인 스승의 권유로 723년부터 727년까지 고대 인도였던 다섯 천축국을 답사하고 그들 나라의 종교, 정치, 문화 등을 기록한 여행기를 남겼는데요. 혜초 스님은 갈 때는 바닷길을 이용하고 올 때는 육로로 간다라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었는데.. 왕오천축국전은 바로 그 육로 여행에 ..

신라왕의 계보와 기간별 세계정세 ( 통일전 )

신라의 시작 박혁거세 이쯤에서 다시 보는 신라왕의 계보.. !! 최초 신라의 시작은 박혁거세로 때로 올라가야 할텐데요.. 사실 신화에 가까운 박력거세의 재위 기간은 BC 54 ~ AD.4 년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중국은 유방의 세운 한나라가 있었구요 서양에서는 예수님이 로마에서 활동하시던 시기였습니다. 박혁거세 시대이후 신라에서는 왕이라는 단어가 없었고 차차웅, 이사금 등으로 불리며 16대에 걸처 353년이 흘러 갑니다. ( 박헉거세- 남해 차차중, 유리 이사금, 탈해 이사금, 지마 이사금, 아달라 이사금 벌휴 이사금, 내해 이사금, 조분 이사금, 첨해 이사금, 미추 이사금, 기림 이사금, 흘해 아시름) 내해 이사름이 신사를 통치하던 시절이 196~230년 인데요 이때 중국에서는 유비,관우,장비, 제갈량..

신문왕 ! 김흠돌의 반란과 왕권 강화.

신문왕 VS 전쟁 공신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삼국통일 전쟁 사이에 지방 토호세력들이 대거 제거되었지만 이과정에서 새롭게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이 등장하였으니 바로 전쟁 공신들 이었습니다. 문무왕 시절부터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 개혁이 시행되고 있었고 6두품을 주요 관직에 등용하는 정책은 상당수 진골 귀족들의 반발을 불려 일으키고 있었는데요 난세를 끝낸 영웅이었던 문무왕 치세 시기에는 불만만 가지고 있던 진골 세력들은 전쟁 공신들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었고 그 중심에 신문왕의 장인 김흠돌과 상대등 김군관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문무왕 사후 신문왕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시기를 노려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는데요.. 젊은 신문왕에게는 이들을 정리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가 되었습니다. 김흠돌의 반란 김군관은 백제와 고구..

삼국통일, 통일신라(?)와 불교

신라의 삼국통일(?) 매소성 , 기벌포에서 당나라 군을 물리친 신라는 드디어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통일 왕조를 열게 됩니다만 국토는 당나라와 신라가 처음 약속한 대동강 이남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사실 한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이외에도 부여, 가야, 낙랑 등 여러 나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삼국통일 이라는 말도 조금 어색한 말인데요 고구려의 광활한 땅을 모두 잃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토에 1/4 정도만 차지하게 된 상항을 삼국을 통일했다고 하기에도 민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 30년 후에 세워진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생각한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말은 조금 어패가 있기도 하죠.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도 통일 전부터 있었던 나라지만 통일진나라 라고 하지 않고, 중국의 삼국시대..

나당전쟁 ! 매소성, 기벌포 그리고 구세주 토번 ( 티벳 )

신라 VS 당나라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아직 고구려와 본격적으로 싸우기 이전부터 신라는 영토 문제에서부터 당나라와의 삐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치려고 했을 때는 백제 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고구려 지역 중 대동강 이북은 당나라가 차지하기로 했었는데요.. 막상 백제가 무너지자 당나라는 백제 지역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해 관리하려 하였습니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왕족의 자식들을 볼모로 보내고 당나라에 군권의 일부까지 가져다 바치다시피 하면서 전쟁을 이끌어 왔지만 땅을 더 넓히기는 커녕 당나라에 나라를 통째로 빼앗길 위험에 처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런 불만 속에 663년 당나라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부르며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임명하는 등 신라로서는 두고 볼 수 없..

고구려 멸망 과정. 연개소문과 연남생.

고구려 멸망. 고구려의 멸망 과정을 보면 무너진 왕권, 정치불안, 내부 분열 , 민란 발생, 외세의 침략 등 대제국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들이 모두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특히나 고구려의 멸망이 허망하고 슬프게 느껴지는 것은 광개토대왕 , 장수왕 등 이전의 고구려 역사가 보여줬던 기개와 강인함이 몇몇의 사람들로 인해 힘없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개소문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많은 것을 잃고 힘들어하던 고구려의 영류왕은 수나라가 무너지고 세워진 당나라에 조공을 보내서라도 잘 지내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대로 막리지 집안으로 권세를 누리고 있었던 막리지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에 결사반대를 하였는데요. 이러한 대립 끝에 결국 연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치열한 외교전쟁. (7세기 한반도)

7세기 동북아 정세 642년 고구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이고 고구려를 차지했으며,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해 들어갑니다. 고구려를 침공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당태종 이세민은 연개소문의 정변을 명분 삼아 침공 준비에 들어가고 백제의 공격을 받은 신라는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대당 강경파가 권력을 잡은 고구려는 이제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를 해야 했으나 당나라가 북쪽으로 쳐들어 왔을 때 남쪽의 백제와 신라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고.. 신라를 공격한 백제는 서쪽으로는 당나라 북쪽의 고구려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당나라가 고구려 보다 바다를 건너야 하는 백제를 먼저 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곁가지로 왜 나라는 이전부터 오랫동안 백제와 가깝게 지내고 있지요.. 아무튼 7세기 중반 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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