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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111

얄타 회담, 카이로 회담, 카사블랑카 회담. 그들만의 외교전쟁.

종전을 대하는 각국의 속내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우발적 충돌이나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전쟁도 있지만 대부분 전쟁은 정치적 이유로 시작되는데요.. 이렇기 때문에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종전은 어떨까요? 종전도 마찬가지로 매우 정치적입니다. 전쟁의 시작점이 군인이었다면 전쟁의 끝에는 항상 정치인이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개전보다 종전이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합니다. 전쟁 기간동아 쌓인 수만은 경제적 문제과 악감정들 그리고 전후 처리 문제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이 때문인데요.. 한국전쟁의 종전선언이 아직도 이루어 지지 않은 것만 봐도 종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 알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은 세계대전을 어떻게 수행할지, 전..

프로파간다 ! 본토결전으로 내몰린 일본인.

프로파간다 ( Propaganda ) 프로파간다는 어떤 주장들을 대중에게 설명하여 이해와 동의를 얻으려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특정한 사상적 노선이나 의도에 따라 대중의 사회적 태도에 영향을 주려고 하는 정보제공 등의 활동을 말하는데요.. 정치선전이나 상업, 종교, 사상선전 등 여러가지 모습으로 행해지며 세뇌와 같은 방식으로 교육에 침투하기도 하고 확인되지 않거나 거짓정보가 활용되기도 합니다. 1945년 패망을 향해가던 일본에서도 자국의 국민들을 위한 프로파간다를 진행하였습니다. 일본 군부는 연합국이 주축국을 점령했을 당시 점령지에서 살인과 강간, 약탈을 자행했다는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정부나 천황의 말이라면 언제나 철석같이 믿어주는 일본 국민들은 일본이 점령당하면 어차피 죽거나 강간당할 것이라는 소문을 ..

도쿄대공습. 소이탄에 불타는 일본

일본 대공습 다가오는 미국의 공습 태평양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은 솔로몬과 뉴기니를 함락하고 길버트 제도를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오지마를 점령하면서 걸림돌이 사리진 미국은 점점 일본 본토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942년 미 육군항공대 둘리틀중령이 이끄는 둘리틀 특공대는 진주만 습격에 대한 반격으로 일본 본토에 폭격을 가했을 때 일본인들에게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지만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둘리틀 공습은 한편으로는 일본인들에게 "미국의 폭탄은 두려워 할게 못된다"라는 편견을 심어주었습니다. 실제 폭격을 경험한 일본 국민 대부분은 미국의 폭탄은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일본정부도 방공망을 강화해 미국의 공습에 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요 1943년에..

극악의 이오지마 전투. 아버지의 깃발 vs 이오지마에서온 편지

이오지마 섬 도쿄에서 12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오지마는 원래 아무것도 없는 화산섬이었습니다. 하지만 1944년 태평양 전쟁이 끝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필리핀을 탈환한 미국이 마리아나 제도를 공격해 점령하고 사이판의 비행장을 거점으로 일본 본토를 폭격하려 하면서 이오지마는 일본과 미국 모두에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까지는 거리가 상당이 있었는데요.. 일본 본토로 이어지는 중간지역에 있는 이오지마 섬에서 일본은 미군 폭격기 무리의 이동을 미리 감지하고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B-29 폭격기들과 달리 항속거리가 짧은 호위기들은 일본 본토에 닿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고 호위기 없는 B-29는 이오지마 레이더 기지에서 정보를 받고 출격한 일본 항공..

가미카제 등장과 그 배경 ! 일본의 마지막 비명

가미카제 등장의 배경 "나 같은 우수한 조종사를 죽이다니 일본은 끝장이야, 난 굳이 몸으로 들이받지 않아도 놈들의 갑판에 폭탄을 명중시킬 수 있다고. 나는 천황이나 일본제국을 위해 가는 게 아니야.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 가는거지 전쟁에서 지면 미국 놈들이 내 아내를 어떻게 할지 모르는 거 아니야?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으러 간다" - 세키 유티오 대위 - 세키 유키오 대위는 일본에서 첫 번째로 가미카제 자살 특공을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전에도 항공기가 상대 항공모함에 돌진한 경우는 있었습니다만 그들은 연료가 떨어졌거나 대공포에 맞아 비행 불능 상태에 빠지는 등의 급박한 상황에서 우발적, 충동적으로 벌인 공격이었지 출격 전부터 자폭을 결정하고 뛰어들어 공격을 가한 것은 유키오 대위가 처음이었..

'일본인은 초식동물' 임팔작전의 무타구치 렌야

임팔 작전의 시작 1942년 5월 일본은 아시아 전역에서 날뛰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동아시아를 점령하고 있었는데요.. 애들 손목 비틀듯 미얀마까지 장악해 버린 일본은 내친김에 인도까지 점령해 버리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영국이 유럽에서 독일을 상대하기도 버거운 상황이었으니 그 틈을 노리려고 했던 것이였지요.. 일본 입장에서는 어느정도 인도가 공략된다면 인도에서 독립을 위한 반란을 일어나 영국에 대항할 것이고.. 그럼 손쉽게 인도에서 영국을 몰아내고 자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이 신경 썼던 것인 인도 , 뱅골만, 미얀마를 통해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연합국의 보급이었는데요.. 중국과의 중일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본의 입장에서..

사이판 전투와 만세절벽 ! B-29 폭격기 , 절대방어선

사이판 전투 일본이 "전쟁의 패배를 인정해야 해야만 했던 순간이 언제 였을까?" 물어본다면 많은 전문가들은 '사이판 전투'라고 대답한다고 하는데요 이는 사이판이 함락되었을 당시 '후쿠도메 시게루' 해군 중장의 발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이판을 잃었을 때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버렸음을 깨달았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1942년 남태평양 해전 이후 1년 8개월 동안 일본과 미국 사이의 항공모함을 동원한 직접적인 해전은 없었습니다. 이 공백기에 미국은 완벽하게 전시 경제로 전환을 했는데요.. 두 달 만에 한척꼴로 정규 항모가 찍어져 나오는 미국을 일본을 더이상 상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한 이후 인도네시아, 뉴기니, 필리핀, 캐롤라인 제도, 마리아나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로 연결되는..

미드웨이 해전. (2/2) 결전의 날. 세계사를 바꾼 5분.

결전의 날. 1942년 6월 4일 태평양 1942년 6월 4일 오전 10시 25분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5분후... 10시 30분 승기는 완전히 미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데요.. 지금까지 그 어떠한 순간도 이보다 빠르게 역사가 뒤집어진 순간은 없다고 하는 바로 그전투~!! 미드웨이 해전 입니다. 1942년 6월 4일 새벽 일본군 함대는 미드웨이에서 400 km 떨어진 지점으로 이동했습니다. 일본군은 이제 미드웨이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요 항공모함 4척에 당시까지만 해도 더 뛰어나다고 평가받던 함재기들이 있었고 조종사들도 진주만과 산호해 해전을 격은 베테랑 들이였으니 전황은 일본군이 훨씬 유리해 보였습니다. 6시 20분 일본의 항공모함 4척에서 일제히 함재기들이 날아올..

미드웨이 해전 ! (1/2) 물러설수 없는 운명의 결전.

미드웨이 해전 1편 결전의 서막 둘리틀 특공대에 의해 본토를 공격받은 일본은 미국의 해상 전력을 박살 내지 않으면 언제든 도쿄나 천황의 궁전에 폭탄이 떨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빠졌습니다. 연합함대 사령관인 '야마모토 이소로투' 제독은 진주만 이후에도 계속해서 미국의 항공모함 전대를 다시 한번 공격해서 완전히 끝장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는데요.. 둘리틀 특공대의 도쿄 공습은 야모모토의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야마모토의 전략은 미국의 함대를 진주만에서 끌어낸 뒤 결정적인 해전을 통해 니미츠의 태평양 함대를 전멸시키겠다는 것이였어요.. 미국의 함대를 진주만에서 끌어내기 위해서 야마모토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미국령 산호섬을 공격하기로 했는데.. 바로 미군의 중요한 비행장이자 급유기지..

둘리틀 공습. 진주만과 미드웨이 사이 !

진주만 공격으로 인해 미군의 사기는 땅에 덜어졌습니다. 막을 수도 있었던 일본의 공격에 슬퍼하고 또 스스로 자책했습니다. 그리고 미군과 미국 시민들은 분노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태평양함대의 지휘를 맞게된 사령관이 바로 니미츠 였습니다. 니미츠는 장황한 연설을하고 선동하는 대신 조용히 사람들을 달래고 감싸안았습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날뛰고 있는 일본을 그냥 두고보고 있을수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더이상 전함을 잃는다면 미국에게는 치명상을 입게되는 것이였는데요 자신들의 해군 전력을 보호하면서 일본을 공격해야 했기에 니미츠는 신중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대통령이였던 루즈벨트의 생각은 달랐지요.. 그는 곧은 대선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성난 미국 시민들에게 뭔가를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자국의 영토을 공격당하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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