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가미카제 등장과 그 배경 ! 일본의 마지막 비명

기차타고시베리아 2021. 12. 2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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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카제 등장의 배경


"나 같은 우수한 조종사를 죽이다니 일본은 끝장이야, 난 굳이 몸으로 들이받지 않아도
놈들의 갑판에 폭탄을 명중시킬 수 있다고. 나는 천황이나 일본제국을 위해 가는 게 아니야.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 가는거지 전쟁에서 지면 미국 놈들이 내 아내를 어떻게 할지
모르는 거 아니야?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으러 간다" - 세키 유티오 대위 -


세키 유키오 대위는 일본에서 첫 번째로 가미카제 자살 특공을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전에도 항공기가 상대 항공모함에 돌진한 경우는 있었습니다만 그들은 연료가 떨어졌거나
대공포에 맞아 비행 불능 상태에 빠지는 등의 급박한 상황에서 우발적, 충동적으로 벌인
공격이었지 출격 전부터 자폭을 결정하고 뛰어들어 공격을 가한 것은 유키오 대위가
처음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가미카제 특공을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저히 미국의 기동함대를 뚫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겨우 이착륙 훈련을 마친 신참 조종사들을 데리고 대공포의 벽과 최신 함재기 산으로 둘러쳐진
미군 기동함대 부대를 공격해 항공모함을 격침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었지요..
결국 생각해낸 것이라곤 목숨을 건 자폭공격뿐이었습니다.

진주만 습격 이후 급속하게 전시경제로 전환한 미국은 이제 두 달에 한 척꼴로 정규항 공모함을
찍어내기 시작했고 전투가 계속될수록 물자만큼 경험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태평양 전쟁 초기 와이드켓과 신참 조종사로 버텨야 했던 항모 비행단은 일본 전투기를 압도하는
신형 기체와 충실히 훈련받은 조종사로 재탄생되었습니다.

와이드캣 vs 제로센

이에 반해 일본은 전쟁 초기 태평양을 주름잡던 조종사 들은 이미 사리진 지 오래였고
그 빈자리를 신참 조종사들이 대체했으며 동양의 신비라고 자랑하던 제로센은 미군의 신형 전투기
앞에서 '불타는 관'으로 전락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일본은 출구가 없어 보인 그때 가미카제가 등장한 것이었습니다.

가미카제의 등장


'가미카제'란 말은 1274년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일본 정벌에 나섰을 때 불어온
태풍을 의미합니다.

몽골의 두 차례 침공을 물리친 태풍은 말 그대로 '신의 바람' 이였던 것이었지요..
미국의 압도적인 전력 앞에 점차 본토로 밀려가는 일본으로서는 반전의 기회나
신급 희망이 필요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처음 자살 특공에 대한 계획이 처음으로 지휘부에 보고 되었을 때 연합함대 사령관인
도요다 소에무는 이를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당연한 결정이었지요..

군대의 인적 자원 중 가장 비싸고 양성하기 어려운 자원이 바로 전투기 파일럿입니다.
이 때문에 전투기 조종사 구조를 위한 부대를 따로 운영하고 조종사들도 정기적으로
생존훈련을 받기도 하는데요.. 이들은 전쟁에서 최우선으로 지켜야 할 인적 자원였습니다.

가미가제 공격을 받는 미국함선


그런 그들을 자살특공 작전에 투입한다는 것은 전쟁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만큼 일본은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만큼 전쟁에 미쳐있었습니다.

1944년 10월 15일 미국의 기동함대가 필리핀 루손 앞바다에 출몰했다는 보고를
들은 아리마 마사후미 해군 소장은 직접 공격대를 이끌고 미국 함대를 향했는데요..

'황국의 흥망이 이 일전에 걸려있다 귀관들은 혼신을 다하라'라는 무전을 남기고
미국 프랭클린호에 특공을 합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 대본영은 본격적으로 자살특공대 편성을 결정하게 되는데요..
필리핀 전역에 전개한 항공기를 모두 모아봤자 30대 정도밖에 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군의 항공모함을 막을 다른 방법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특공부대가 편성이 되었고 24명의 조종사가 모였습니다 그리고 이 특공부대에
'가미카제'라는 이름이 명명되었습니다.

세키 유키오의 첫 번째 특공


1944년 10월 25일 이전에 네 번이나 특공 상대를 찾다 허탕을 친 세키 유키오 대위의 편대가
다섯 번째 출격에 나섰습니다.

특공기 5대 호위기 4대로 구성된 특공 편대는 보급을 받던 미 해군 함대를 발견했고 오전
10시 53분 일본 최초의 가미카제 특공 편 대은 미국 함대에 돌진을 했습니다.

가미가제 공격장면


세키 유키오 대위는 250kg의 폭탄을 안고 미 항공모함 세인트호에 그대로 돌진하였고 뒤이어
나머지 4대의 전투기도 각각 다른 항공모함과 중순양함에 돌격했습니다.

결과는 항공모함 1척을 격침하고 1척을 대파했으며 중순양함 1척을 격침하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이 정도 전과를 올리려면 항공기 200 대를 동원해도 성공할까 말까 한 성과였지요

이 소식을 들은 오니시 다기지로 사령관의 첫마디는 "세키~눈을 뜨고 있구나" 였다고 합니다.
조종사들은 급강하 시 마지막 순간 눈을 감기 때문에
자살 특공의 명중률이 떨어지는데.. 눈을 감지 않았다고 치켜세워 준 것이었습니다.

뭐 대단한 말 같지만 결국 잘 죽었다는 말을 고상하게 한 것뿐이었지요..

어쨌든 이일로 5명의 특공대원들은 군신으로 추앙받았고 육군과 해군 가리지 않고 자살특공
열풍이 불게 됩니다.

희생되는 신참 조종사들


일본의 자살 특공이 늘어갈수록 문제가 되는 것은 조종사의 수급이었습니다.

자살 특공을 위해서는 적의 레이더를 피하기 위한 초저공 수면 비 비행기술과 목포 물 발견 후
3000m까지 급상승하였다가 목표물을 향해 45도로 기체를 내리 꽃을 수 있는 기술이
필요했는데요..
겨우겨우 비행 훈련을 마친 이들은 이 두 가지 기술을 집중 훈련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애꿎은
자기 목숨만 버리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특공을 위한 편대는 특공기 3대 호위기 2대로 되어있었다고 하는데요.. 호위기 조종사들은
특공기를 지켜준다기보다는 미국 함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 역할이 더 중요했습니다.

급하게 양성된 특공 조종사들은 항법 기술이 부족하여 기상이 조금만 나빠도 길을 헤매었고
미국 전투기라도 만나는 날에는 회피기동을 하면서 호위기를 놓치기 일수였습니다.

특공기가 호위기를 놓치는 순간 이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다를 홀로
헤매다 연료가 떨어지면 바다로 추락 하고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참 조종사들은 멀리서 어떤 것이 특공을 할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물인지 구별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목표물에나 덤벼들곤 했는데요 상륙용 주정에도 돌격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반응


최초의 가미카제 공격에 미군은 반신반의했지만 일본군의 의도를 안 뒤로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정신세계였던 것이었습니다.

맥아더는 자신의 자서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전투기 조종사라는 고급인력을 무의미하게 소비하다니.. 나라면 그런 명령을 내린 놈을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쏴 죽였을 것이다"

미국은 경악했고 자신들을 향한 명백한 살의.. 그것도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행하는 살의
앞에 분노했습니다.


전술적으로는 40%였던 기존의 함재기 중 전투기 비율을 70%로 대폭 늘렸는데요 전투기가
늘어난 만큼 방공능력을 향상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미군들의 감정이었습니다. 자신들을 향한 명백한 살의 앞에
미군들은 분노를 넘어 증오로 대응했습니다.

이는 군인 뿐만 아니라 미국 전체로 퍼져나갔고 전쟁 근간에 깔려있던 인종 차별적 감정이
폭발했습니다.
이감 정이 미국이 큰 고민 없이 원자 폭탄을 사용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가미카제의 신참 조종사들이 미국 함대에 뛰어들 때 영화에서 처럼 "천황폐하 만세!~"
라면서 뛰어들었을까요..?
무전기로 들려왔던 그들이 죽기 전 외친 한마디는 대부분 " 어머니~" 였다고 합니다.

군국주의 일본은 주변국들과 자신들의 국민을 지옥으로 내몰았던 것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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