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둘리틀 공습. 진주만과 미드웨이 사이 !

기차타고시베리아 2021. 11. 2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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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격으로 인해 미군의 사기는 땅에 덜어졌습니다. 막을 수도 있었던 일본의 공격에
슬퍼하고 또 스스로 자책했습니다. 그리고 미군과 미국 시민들은 분노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태평양함대의 지휘를 맞게된 사령관이 바로 니미츠 였습니다.
니미츠는 장황한 연설을하고 선동하는 대신 조용히 사람들을 달래고 감싸안았습니다.

잠수함에서 취임하는 니미츠 제독


미국은 아시아에서 날뛰고 있는 일본을 그냥 두고보고 있을수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더이상 전함을 잃는다면 미국에게는 치명상을 입게되는 것이였는데요
자신들의 해군 전력을 보호하면서 일본을 공격해야 했기에 니미츠는 신중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대통령이였던 루즈벨트의 생각은 달랐지요.. 그는 곧은 대선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성난 미국 시민들에게 뭔가를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자국의 영토을 공격당하고도 아무런 반격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무능한 사람으로 보이게되어
삼선에 실패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단순히 복수심이나 정치적인 이유 뿐만이 아니였습니다. 미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기때문에 사기를 끌어울리기 위해서라도 빠른 시일내에 일본에게 크게 한방 먹일 수 있는
승리가 필요했습니다



루즈벨트는 육해군을 닥달했고 니미츠에게는 "승리할 때 까지 돌아오지 말아라"
라고 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군에게는 뾰족한 수가 없었는데요.. 일본을 공격할 수 있는 해군전함이 남아있지
않았고 살아남은 항공모함이나 순양함을 일본 본토까지 접근시키기에는 일본 해군이 너무
막강했기 때문이였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가진 나라가 바로 일본이였습니다.

한마디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접근도 불가능 할 뿐만아니라 접근했다 하더라도 성공을
장담할수 없었으며 실패했을때는 패전을 각오해야 했던 것이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해군 참모총장인 '프랜시스 로우' 대령은 항공모함에서 육군의 폭격기를
이륙시켜 일본 도쿄를 공습하는거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게 되는데요..


일반적인 항공모함 함재기는 항속거리기 짧아서 항모를 일본 본토에 가깝게 접근
시켜야했기 때문에 기습이 불가능 하고 도중에 발각되 격추당할 위험이 크지만
육군의 폭격기는 항속거리가 길어 멀리서 출발 시킬수 있고 혹시나 실패하더라도
항공모함은 살릴수 있다는 의견이였습니다.

작전이 가능하다면 폭격기가 항모를 떠난후 항모와 호위함들은 바로 위험 지역에서
벗어나 대피하고 폭격기들만 도쿄 및 주요도시를 찾아가 폭격을 한후 동맹국으로
최대한 멀리 도망쳐 비행기를 버리고 다른 방법으로 귀한한다는 것이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폭격기는 활주 거리가 길기 때문에 항모에서 이륙하기가 힘들었고
더긴 활주로가 필요한 착륙은 완전히 불가능 하다는 것이였습니다.


말이쉽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계회이였습니다. 적지 한폭판에서 흔들리는 배위에서
거대한 폭격기를 이륙시켜야 하는 매우 어려운 작전 이였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할수
있을만큼 최고의 조종사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리하여 작전을 지휘할 지휘관으로 슈나이더 컵 대회에서 우승한 제임스 둘리틀 육군
항공대 중령이 임명되었고 이부대는 둘리틀 특공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특공대 1번기 승무원 , 왼쪽 두번째 둘리틀 중령

총 16대의 폭격기와 최고의 80명의 승모원이 동원된 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 승무원들은
맹연습에 들어갔고 항공기이 항속거리를 늘리기 위해 폭탄을 제외한 무기는 최소한으로 줄였으며
무전기도 제거했습니다.

대신 일본에게는 공포를 미국에게는 승리감을 고취시킬수 있도록 폭격기 2대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었는데요.. 이작전은 실질적인 타격을 주겠다는 목적보다는 심리전의 이유가
컸습니다.

1942년 4월 18일 아침 일본 경비정을 밞견하고 침몰시킨 미군은 예정보다 310km 나 먼
곳에서 10시간이나 일찍 폭격기를 발진 시켰고 둘리틀 특공대는 1200 km 나 날라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정보다 20시간이나 일찍 일본 상공에 폭격기가 나타났습니다.

일본도 이미 미국에 의해 침몰한 경비정이 침몰직전 보낸 무전으로 미국의 공격이 있을것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함재기가 도쿄까지 오려면 항모가 훨씬더 일본에 가까아 와야 했기 때문에 이시간을 감안하면 하루는 더 있어야 항모와 함재기가 나타날 것이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요..


일부 일본인들은 도쿄 상공에 나타난 미군 폭격기를 일본 비행기로 착각하고 손을 흔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예정대로라면 야간에 폭격을 했어야 했지만 백주대낮에 나타난 미국의 폭격기는 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이때문에 심리적 효과는 극대화 되었는데요..

역사적으로 한번도 외국에게 본토가 공격당한적이 없었던 일본에게는 충격과 공포 그자체 였습니다.

폭격기 쵤영 사진

작전후 폭격기 16대는 모두 소실되었지만 80명의 특공대 승무원중 69명이 생환했는데요
80명중 8명은 중국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혔고 3명은 탈출중 사망했다고 합니다

둘리툴 중령은 생환에 성공하여 대령계급을 건더뛰고 준장으로 진급했고 96세까지 살다가
1993에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둘리틀의 도쿄공급은 일본에게 공포감과 수치감을 주었고 미군의 사기를 끌어올렸습니다.

일본은 둘리틀 작전을 도운 중국에게 화풀이를 했는데요.. 중국내 비행장을 확보하겠다는
명목으로 비행장 근처를 공격하고 민간인 학살 저질러 25만명의 중국의 민간인이 희생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폭격기들이 항공모함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일본에서 미국의 전함을 격멸해야
한다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되었는데요..

이를 위해서 그동안 지지 부진했던 태평양에서의 거점 확보를 위한 전투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 되게됩니다.

미국의 공격 목표는 바로 미드웨이 섬 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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