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필리핀 탈환전. 맥아더의 복수 (레이테만 상륙작전)

기차타고시베리아 2021. 11. 15.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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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을 망치기 시작한 일본


일본은 남방 작전을 계획했을 때부터 세 가지 방침을 정했는데요..

첫 번째는 남방작전의 기본목표인 자원 확보로 최대한 자원을 확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점령지 군대는 일본 본국의 보급에 의존하지 말고 식량과 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하라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는 치안확보라는 이름으로 저항하는 현지 주민들은 억압하고 강격 대응을
해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필리핀을 점령하자마자 일본은 필리핀이 쓰던 화폐를 폐지하고 군표를 찍어서
뿌려댔는데요.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일본이 필리핀에 들어온 지 3년이 안돼서 필리핀의
물가가 100배까지 뛰어오른 것이었습니다.

필리핀내 일본군 인식

하지만 이것은 시작이 불과했는데요, 일본군은 필리핀의 경제 기반을 뿌리째 흔들었습니다.

본국에서 보급을 받지 못하는 필리핀 주둔 일본군은 필리핀의 쌀을 수탈해 갔습니다.
수탈도 정도껏 했어야 했는데.. 일본은 필리핀 주민들이 기본적으로 살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식량도 남겨두지 않고 탈탈 털어 갔다고 해요. 그 결과 필리핀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할 정도다고 합니다.

거기다 필리핀의 최대 재배작물이었던 사탕수수 밭을 갈아어고 자신들이 필요한 목화를
심었는데요 이런 무리한 시도 때문에 필리핀의 지주도 소작인도 불만이 하늘을 찌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이들을 총칼로 진압했지요..


일본군 남방 점령지 행동 방침을 지킬수로 필리핀들의 반감은 커져갔고 도망친 필리핀
주민들은 게릴라가 되어갔습니다.

필리핀 게릴라


필리핀은 게릴라 활동하에 더없이 적합한 지역인데요 국토가 71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터라 행정력 공백지대가 존재하고 적도 부근의 열대우림은 은신처로 최고의 장소였습니다.

일본군에게서 탈출한 필리핀 주민들은 게릴라가 되었고 게릴라 조직은 점점 몸집을 불려
나갔으며 맥아더는 이를 철저히 이용했습니다.

미국은 각종 무기와 식량, 보급품을 잠수함을 통해 필리핀 게릴라들에게 전달했고
어느 순간 게릴라의 화력이 일본군을 능가하기 시작했습니다.

필리핀 게릴라

일본군은 자활을 핑계로 필리핀을 수탈하고 자원 확보를 위해 필리핀 사람들을 강제
동원해 구리광산에 밀어 넣은 것도 모자라 도망자 색출을 핑계로 애꿎은 민간인들을 학살
했으니 스스로 수렁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릴라 조직은 100개가 넘었고 그 인원은 30만에 달했습니다. 게릴라는 맥아더의 눈과
귀가되어 상항을 수시로 보고했는데 맥아더가 필리핀에 상륙하기 전까지 7000여 회나 되는
정보를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습니다.

미공군과 필리핀 게릴라

일본은 필리핀에서 다시 싸움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지고 있었습니다.

필리핀 탈환 작전


태평양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발판으로 승기를 잡았고
1944년 7월 9일 일본으로부터 사이판을 찾아왔습니다.

이후 미군 측은 다음 공격 루트를 설정하는데 육군과 해군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해요..
사실 맥아더와 나츠미의 의견 충돌이었습니다.

체스터 나츠미 미 해군제독

조지 마셜 참모총장은 맥아더의 체면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해군에게 주도권을 넘기지 않기 위해
오키나와로 쳐들아가 볼 것을 권유했는데요..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을, 나츠미는 대만 침공을 주장하고 있어 세 사람 모두의 의견이
다 달랐던 것이었습니다.


곧이어 대선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맥아더와 나츠미를 만나 상의했고
결국 필리핀 침공이 결정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그동안 미군의 지원을 받고 있던 필리핀 게릴라를 이용할 수 있었고 필리핀을 그냥 두고
대만을 공격했을 때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고 해요..

그리고 필리핀에서 꼭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도 도망친 맥아더는 구겨진 채면을
반드시 찾아야 하기도 했습니다.

People of Phillppines, I have Returned.

필리핀 국민들이여 내가 돌아왔다!
1944년 10월 22일 맥아더는 약속한 대로 필리핀으로 돌아왔습니다.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작전을 위해 레이테만에 상륙했습니다.
레이테만 은 게릴라들이 가장 많이 포진해 있어 자원과 정보가 풍부했고 이미 이곳의 일본군은
필리핀 게릴라도 상대할 수 없을 만큼 부족하다는 정보를 확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이테만에 집결한 700 여척의 함선은 일제 사격으로 일본군 수비 병력을 쓸어버렸고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습니다.

맥아더는 별 저항 없이 레이테섬에 상륙했고 자신의 선전을 위해 기록영화를 찍으며
여유 있게 해변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필리핀에 돌아온 맥아더


맥아더는 허겁지겁 가족만 데리고 호주로 도망친 지 2년 7개월 만에 다시 필리핀에 돌아왔고
필리핀에게 미군은 해방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레이테 섬에 있던 일본 16사단은 잔존 병력을 수습해서 후퇴했지만 이미 미군의 눈과 귀가된
필리핀 주민들은 일본군의 행로를 수시로 미군에 알렸고..
미군의 공격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결사적으로 해변까지 기어 나온 일본군을 기다린 것은
필리핀 사람들 이었습니다,

필리핀 사람들은 들고 있는 몽둥이, 농기구로 일본군을 때려죽였다고 합니다.

일본에게 필리핀 함락은 패전을 의미했는데요.
일본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남방 자원지대의 자원이 필요했지만 그 수송 루트의
목줄이 되는 필리핀이 점령되었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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