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무사도와 전진훈이 만든 바탄 죽음의 행진

기차타고시베리아 2021. 11. 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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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탄 죽음의 행군의 이유


맥아더가 호주로 도망간 이후 바탄반도에 남겨진 미군은 결국 일본군에 항복을 하게 되는데요..

포로가 되는것을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일본군은 미군 포로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며
120km 떨어진 오도넬 수용소까지 물과 식량도 제대로 주지 않으며 행군 하도로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승리했지만 보급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고 포로들의 규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는데요 일본군 참모가 포로를 엄중히 감시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조작해 포로를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려 일본군은 실탄과 운송수단이 필요없는
죽음의 행진을 계획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일본의 이런 만행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무사도나 진진훈 같은 개념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는게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무사도(武士道), 전진훈(戰陣訓)


우리는 흔히 일본을 무사도의 나라로 알고 있는데요. 벚꽃 같은 죽음을 생각하며 여차하면
배를 가르는 자살을 찬양한 모습을 떠올리지만 사실 에도시대 통치이념은 조선에서 건너간
주자학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강희맹의 5대손인 강항이 몇 년 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에 주자학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주군에 충성하고 주군이 죽으면 와신상담하다가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원수를 갚는다든지 하는 것은 있었어도 분명한 사실은 당시 일본이 통치 이념은
주자학이었고 오늘날 TV 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사무라이 문화는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하고 청일전쟁으로 동북아 패권을 거머쥔 일본은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할 국가이념이 필요했고 이때 도쿄대 철학과 교수였던
이노우에 데 쓰기로 가 들고 나온 것이 바로 무사도였습니다.

군국주의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일본에서는 점점 무사도에 대한 서적이 쏟아져 나왔고
'이노우에'는 서양의 기사도와 비슷한 개념으로 설명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이 무사도 때문이라고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며 미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 미국에나 유럽에서도 이노우에의 책이 인기가 있었다고 해요.

일본에서 스스로 전통이라는 것을 참조해 낸 것이 인데요. 국민을 쉽게 통제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경제적 사회적 차이를 넘어 하나의 공동체로 묶을 수 있는
상상의 개념인 무사도를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이 무사도의 제국주의 군대버전이 전진훈입니다.

전진훈

전진훈은 1941년 당시 일본 육군대신 '도죠 히데끼'가 일본 군인이 전장에서 지켜야 할
도덕과 마음자세를 전군에 내린 훈령인데요 이전진 훈 만으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전진훈 1장 제1조 -대일본은 황국이다 만세일계의 천황이 계시며.... (중략)
맹세코 황국 수호의 중대한 임무를 완수해야 할 것이다

1장 제7조 필승의 신념 : 믿음은 힘이다 스스로 믿고 의연히 싸우는 자는 항상 승자다.
..(중략) 승리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2장 제6조 (책임) 임무는 신성하고 책임은 지극히 귀중하다
2장 제7조 (생사관) 생사를 관통하는 것은 숭고한 헌신 봉공의 정신이다.
생사를 초월하여 일의 임무와 완성에 매진해야 한다
2장 8조( 명예를 아낄 것) 수치를 아는 자는 가장 강하다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말 것이며 죽어서 죄화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

특히 제2장의 6조~8조를 보면 태평양 전쟁의 일본군의 광신적인 만세 돌격과 옥쇄의
이유를 알 수 있는데요.. 임무는 반드시 달성하고 대의 앞에 목숨을 내놓아라.
포로가 될 바에는 그냥 죽어라. 이런 내용에는 개인은 없고 오직 조직만이 있습니다.


일본은 이런 식으로 병사들을 교육했고 이를 확대해 일본 천체 사회에 이를 퍼뜨립니다.
지금의 일본이 조직을 중요시하고 개인의 성향은 애써 무시하는 문화는 여기서부터 시
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탄의 죽음의 행군


이러한 일본군은 필리핀 바탄에서 항복한 미군 포로들은 명예를 모르는 짐승 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호주로 맥아더가 도망가면서 남겨진 미군과 필리핀군 7만 5천 명은 바탄반도에서
오도넬 수용소까지 120 km의 거리를 걸어서 행군해 가야 했습니다.

일본군은 물도 먹을 것도 주지 않은 상태로 포로들을 행군하게 했고 낙오되거나 뒤쳐지는
포로들은 여지없이 일본군의 총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죽음의 행군으로 2만 명이 넘는 포로가 길에서 죽었으며 수용소에 도착한 포로들 중
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극단적인 만행의 이유로 국제사회는
포로에 대한 협의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살인자 일본군을 쓸어내자는 당시 미국 포스터

죽음의 행군 당시 미국에서는 이 상황을 몰랐고 이후 몇몇 포로들이 탈출에 성공하게
되며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사회는 강한 충격과 분노를 표출하였습니다.
탈출한 맥아더가 분노에 차 와신상담하며 복수이 날을 기다린 건 당연할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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