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선의 맥아더.
태평양전쟁 직전 맥아더는 신생 필리핀군의 군사고문이자 필리핀 육군 원수이기도 했습니다.
맥아더는 여러모로 필리핀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었는데요 그의 아버지는 필리핀 군사령관
이었고 맥아더 자신도 필리핀에서 두 차례나 근무를 하기도 했습니다.
맥아더는 제1차세계대전의 전쟁영웅이었는데요. 30세의 젊은 나이에 사단장을 맡기도 했었고
미군 사단장가운데 가장 많은 열다섯 개의 훈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공황시기 퇴역 군인들이 1945년 지급하기로 한 보너스를 조기 지급해 달라고
평화적인 시위를 한적이 있었는데.. 이 시위대를 탱크를 동원해 밀어 버릴 만큼 아주 독선적인
사람이었다고 해요.
맥아더는 이 시위대는 공산혁명을 일으키려는 '빨갱이'라고 주장을 했는데요 사실 이 사람들은
그저 배고 고파서 보너스를 미리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맥아더 장군을 군대에서 잠시 떠나 있게 하는 단초가 되었는데요 대공황의
한가운데에서 먹기 살기도 힘든 마당에 미정부는 군대에 배정된 예산을 감축하려고 했고
이에 반대하던 맥아더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날선 대립을 하게 됩니다.
맥아더 장군은 결국 대통령과 충돌하며 최연소 육군참 보총장 자리에서 물러나 고문자격으로
가족들과 함께 필리핀으로 떠나게 됩니다.
필리핀에서 맥아더는 왕처럼 살았는데요 필리핀 최고 호텔인 마닐라 호텔 최상층에서 지내며
이곳저곳에 투자를 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황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던 와중에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일본의 계획이 점점 구체화 되어갔고 맥아더는
필리핀 방면 최고사령관으로 발령이나 필리핀 방어부대를 지휘하게 됩니다.
필리핀 방어전 (바탄전투)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했을 때 필리핀에 있던 미군은 3만 명, 필리핀 군은 12만 명으로 일본군
4만 3천 명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런데도 맥아더는 일본군에게 판판히 깨져 호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맥아더가 인천 상륙작전으로 대한민국과 이승만 정권을 살려낸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필리핀에서의 방어작전의 실패는 온전히 맥아더의 무능과 방심이 그 이유였습니다.
1941년 12월 8일 맥아더는 진주만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필리핀에 전개해 있던
미국의 전력 폭격기와 전투기를 한 곳에 모았습니다.
일본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려고 했지만
출동하기도 전에 일본 해군 항공기에 모두 격파당하고 레이더 기지까지 박살이 납니다.
공군은 박살이 났지만 맥아더에게는 아직 15만의 병력이 남아 있었지요. 하지만 이때
맥아더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되는데요.. 맥아더는 병력을 해안가에 배치해 혹시 모를
일본의 상륙작전을 대비합니다.
하지만 7000 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에서 상륙작전을 대비해 해안선을 방어
한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상식 밖의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필리핀 방어 전략은 수도 마닐라로 들어가는 마닐라만을 방어할 수 있는 바탄반도로
빠르게 들어가 방어를 하면 일본 해군이 필리핀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으니
나중에 도착할 증원부대가 올 때까지 이 지역을 걸어 잠그고 지켜야 하는 것이었는데요..
맥아더는 자신이 영웅이 되고 싶었던 것이었어요..
참모들은 해안방어 대신 병력을 수습해 내륙으로 이동해 거점 방어를 하자고 했지만
독선과 오만에 가득 차 있던 맥아더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미군은 바다만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고 일본군은 손쉽게
상륙해 필리핀을 종단해 버렸습니다.
바판반도로 후퇴한 맥아더는 바탄반도에 갇힌 채 그렇게 3개월을 버텼지만
전황으니 도통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호주로 피신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맥아더는 'I shall return (반드시 돌아오겠다)"라는 말을 남기도 가족화 함께 호주로
도망쳤고 이후 이루어진 일본군의 총공세에 1942년 4월 9일 미군은 항복했습니다.
남아있던 7만 6천 명의 미군은 고스란히 포로가 되었고 그 유명한 비탄 죽음의 행진으로
2만여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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