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최후통첩, 헐 노트 ( Hull Note)
1941년 11월 26일 미국은 일본에게 최후통첩을 날리는데요 바로 당시 미국의 국부 장관
코델 헐 (Cordell Hull) 이 주미 일본대사 노무라 구루스에게 전달했던 헐 노트입니다.
일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은 조건이었고 미국 정부도 일본이 헐 노트의 내용을 받아들일
것 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런 조건을 던진 것이었을까요? 이유는 미국은 일본의 외교 암호를 이미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해요.
주미 일본대사는 본국으로부터 두 가지 카드를 전달받았는데요..
첫 번째는 '일본군을 제한적으로 철수하고 중일전쟁을 종료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일본에 석유 수출만 재개한다면 동남아시아와 중국에서 군대를 철수할 수 있다'
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이런 일본의 말을 모두 믿지 않았습니다.
미국도 일본은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요.
미국의 정보망에 들어온 정보로는 일본이 계속 군사 행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인도차이나와
중국에 주둔한 군대도 철수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시간 끌기 용인 말뿐이라고
생각했다고 해요..
미국의 정보전
미국의 권력 수뇌부가 일본의 정보를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헐 노트'를 일본에 건네고 얼마 안가 루스벨트와 군 수뇌부에게 보라색 종이가 배달됩니다.
보라색 문건은 1급 기밀로 분류되어 수뇌부에 한해 열람할 수 있는 최신 정보였는데요..
보라색 종이에는 일본의 외무 대신이 주미 일본대사 '노무라 구르시'에게 보낸 암호 전보의
원문과 해독 문이 담겨 있었습니다.
"귀관들은 인간의 한계 이상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굴욕적인
제안을 해왔다. 이제 교섭은 완전히 결렬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와 같은 인상을 주지 않도록 유의할 것 "
이런 외교 전문이 그대로 미국 수뇌부로 들어간 것이었고 미국은 조만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즉 미국도 일본이 조만간 쳐들어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준비했지만 설마 진주만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어요.
당시 미국 육군 장관 헨리 스팀슨은 루스벨트가 미 군부와의 회의에서 발언했던 내용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 일본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시작하기로 악명이 높기 때문에 아마 12월 1일 월요일
미국을 공격할 것이다"
루스벨트의 예상은 살짝 빗나갔지만 일본이 공격을 해올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요
문제는 어디를 공격할 것인가 였습니다. 당시 미국은 말레이시아나 동인도 제도 등
아시아 지역에 주둔한 미군을 상대로 싸움을 걸어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과감하게 진주만을 공격한 것이었어요.
공격 후 선전포고 ( 대환장 선전포고문 )
하와이 시각으로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49분 항공모함을 떠난 일본의 전투기와 폭격기는
진주만에 어뢰와 폭탄을 떨어뜨렸고 이 소식은 곧 미국 정부에 전했덨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뒤인 8시 50분 노무라 주미 일본 대사는 미국의 힐 국무장관 앞에서 5000 자에
이르는 선전포고문을 읽기 시작합니다.
헐 장관은 이 정체모를 문서의 낭독을 다 듣고 격노하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해요..
"50년 공직 생활 동안 이도록 파렴치하고 허위와 왜곡으로 가득 찬 문서는 본 적이 없다
지구 상의 어떤 정부도 이렇게 거창하고 악의에 찬 수치스러운 허구를 조 잭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지 못했다"
진주만이 이미 공격당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일본 외교관들은 영문도 모른채 쫓겨나
대사관에 돌아서야 진주만 공격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일본 정부는 주미 대사관에 선전포고문을 12월 7일 새벽 2시 반에 전달하고 이 문서엔
위싱턴 시각 오후 1시까지 미 국방부 장관을 만나 전달하라는 명령이 적혀있었는데요..
위싱턴 시간 오후 1시는 하와이 시간 오전 7시 30분으로 일본은 공격 개시 딱 20분 전에
선전포고문을 전달하려고 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일본 정부는 선전포고가 달갑지 않았지만 억지로라도 하려면 딱 20분 전에 하자는 의도였지요..
문제는 급하게 전문을 받은 주미 일본 대사관이었습니다. 제대로 해독하고 이를 다시
정확히 번역하려면 시간이 너무 모자란다고 판단한 주미 일본 대사관은 '헐 장관'과의 약속을
오후 2시로 연기했습니다,
노무라 주미대사가 국무성에 들어간 시간은 1시 50분으로 이때는 이미 진주만이 박살이 난 뒤였고
이미 헐 장관은 진주만 공격 보고를 듣고 충격에 휩싸인 상태였습니다.
일본은 국제법상 선전포고의 형식을 갖추지만 내용은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미국이 이게
선전포고인지 아닌지 고민하게 만들어서 기습공격의 성공확률도 높이고 싶은..
그 야말로 꼼수였고 게다가 20분이라는 촉박한 시간은 속이 뻔이 보이는 처사였는데요.
그나마 이런 선전포고마저도 늦게 전달되었으니 참 미국으로써는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선전포고문은 미국 고위 관료와 정책결정자 들이게는 '환상의 선전포고문'이라고
불리며 멸시와 환멸의 대상이 되었고
공격이 끝난 뒤 선전포고를 전달받은 상황은 미국 국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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