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도쿄대공습. 소이탄에 불타는 일본

기차타고시베리아 2021. 12. 2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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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공습

다가오는 미국의 공습


태평양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은 솔로몬과 뉴기니를 함락하고 길버트 제도를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오지마를 점령하면서 걸림돌이 사리진 미국은 점점 일본
본토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942년 미 육군항공대 둘리틀중령이 이끄는 둘리틀 특공대는 진주만 습격에 대한 반격으로
일본 본토에 폭격을 가했을 때 일본인들에게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지만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둘리틀 공습은 한편으로는 일본인들에게
"미국의 폭탄은 두려워 할게 못된다"라는 편견을 심어주었습니다.

실제 폭격을 경험한 일본 국민 대부분은 미국의 폭탄은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일본정부도 방공망을 강화해 미국의 공습에 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요 1943년에는 집집마다 방공호를 만들었고 상점가에는 참호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이 참호에 대해 불만이 많았는데요 등화관제를 한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길을 걷다가 참호에 빠지는 일들이 많았고 실제로 골절환자가 급격히 증가했다고 합니다,



1943년말 일본 내무성은 도쿄에 방공 총본부를 설치했고 화제시 불을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중간중간 공터를 남겨놓는 방화대 설치에 나섰는데요.. 방화대 자리에 집이 있었던 주민들은
정부가 지정한 폐건물이나 주면 친척집으로 이주해야 했는데 그 수만 2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B-29와 르메이의 등장.


B-29 폭격기는 당시에 구현할 수 있는 모든 신기술을 집약한 첨단기술의 총합이었습니다.
엔진 출력이나 중앙제어식 기관총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초기형 컴퓨터 을 장착하고 고도
3만 피트에서 항속거리 5000 km 가 넘어가는 어마어마한 작전반경까지.. B-29는 미국에
필승의 카드였던 것이었습니다.

후지산과 B-29

B-29에는 고고도에서 기압을 조절해주는 여압장치를 작추고 있었는데요 B-29의 설계와 제작을
담당한 보잉사는 이를 개발하면서 얻은 여압 설계능력과 장거리 운항능력 확보로 오늘날 최고의
민항기 생산업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B-29가 일본 상공에 등장하면서 1945년 2월 일본 대폭격을 책임지는 21 폭격기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커트시 르메이 가 취임을 합니다.

'인간 백정'이라고 불리는 커티스 르메이.. 베트남 전쟁 당시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라고 하면서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돌려놔야 한다고 주장해 주변을 아연 질색하게 만들기도 했던 사람!
바로 그 르메이가 일본 폭격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대공습의 시작


르메이는 취임 후 일본의 주책이 주로 나무와 종이로 만들어져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폭격기에
소이탄을 가득 채우고 공습을 시작했습니다.

1945년 3월 9일 사이판과 티니언 섬에서 344대의 B-29가 날아올랐습니다. 이들 폭격기들은
총 2400 여론의 소이탄을 도쿄 시내 8500 이곳에 떨어뜨렸고 이로 인해 12만 명이 사망하고
가옥 25만 채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일본 본토에서 지옥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도쿄대공습 직후

일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당시 일본은 본토에 우수한 레이더를 확보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물자 부족 등의 이유를 이를 거부해 오고 있었고 고고도에 떠있는 B-29를
제로센이 올라가서 요격하기도 어려움이 있어 이를 방어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거기다 "신들의 나라인 일본 본토는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믿음까지 더해저
본토 방어에 대한 개념도 부족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오지마가 함락된 이후 일본은 시원하게 뚫려있는 고속도로처럼 B-29를 코앞에서
확인해야 했습니다.

3월 9일 도쿄 : 10만 명 사망, 26만여채 파괴
3월 11일 나고야 : 사방 5.3 km 전소
3월 12일 오사카 : 4천 명 사망.
3월 16일 고베 : 8천 명 사망, 이재민 65만
3월 28일 나고야(2차) : 사방 7.6km 전소

1945년 3월 일본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미국은 일본 전역 게 폭격 경고문을 뿌리고
한 달간 휴업에 들어갑니다.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폭탄 재고가 부족하여 잠시 쉬어가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도쿄 대공습

그사이 일본인들은 요코하마로 도망 가기 시작했습니다. 요코하마는 한 번도 미국의
폭격 대상에 들어 있지 않았었기 때문인데요 일본인들은 스스로 미국은 일본땅에 상륙하기
위해 요코하마는 폭격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전역으로 이런 망상이 퍼져나갔고 급기아 요코하마로 들어가는 국도에는
민간인들이 가득 들어차게 되었습니다.

하지 마 이러한 기대는 한순간 산산조각 나고 말았는데요.. 한 달간 휴식을 가진 미국은
1945년 5월 요코하마를 폭격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간인 사망자는 5000여 명에 불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규모 공습과 일본의 피해


미국은 7월까지 9만톤에 가까운 폭탄을 일본에 투하하였고 여름이 되면서 일본은
모든 상황에서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7월까지 50만 명이 폭격으로 사망하였고 1300만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집을 잃은 아이들은 영양실조나 결핵으로 사망하였고 생존자들은 개울가나 샘, 철도역,
도시 외각의 불타지 않은 지역에서 간신히 연명을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국유 철도망을 통해 가고 싶은 곳까지 갈 수 있도록
무료승차권을 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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