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극악의 이오지마 전투. 아버지의 깃발 vs 이오지마에서온 편지

기차타고시베리아 2021. 12. 2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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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 섬


도쿄에서 12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오지마는 원래 아무것도 없는 화산섬이었습니다.
하지만 1944년 태평양 전쟁이 끝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필리핀을 탈환한 미국이 마리아나
제도를 공격해 점령하고 사이판의 비행장을 거점으로 일본 본토를 폭격하려 하면서
이오지마는 일본과 미국 모두에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까지는 거리가 상당이 있었는데요.. 일본 본토로 이어지는
중간지역에 있는 이오지마 섬에서 일본은 미군 폭격기 무리의 이동을 미리 감지하고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B-29 폭격기들과 달리 항속거리가 짧은 호위기들은 일본 본토에 닿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고 호위기 없는 B-29는 이오지마 레이더 기지에서 정보를 받고 출격한 일본 항공기의
요격받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게 됩니다.

반대로 일본은 이오지마에서 가까운 마리아나 제도까지 내려가 미국 비행장을 공격할 수
있었고 상당한 수의 B-29를 파괴하기도 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일본은 이오지마 섬에
레이더 기지를 건설하고 5000 명이 넘는 병력을 추가 배치하면서 절대사수에 들어갑니다.


미국은 반드시 이오지마를 함락해 일본 공습의 교두보로 삼아야 했고 일본은 이오지마가
없으면 본토 공격을 막아낼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명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이 이오지마 전투를 배경으로 두 개의 영화를
만들었는데요 미국의 관점에서 본 "아버지의 갓발"과 일본의 입장에서 그려진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입니다.

아버지의 깃발(좌)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우)

영화이 주재는 서로 다른데요 '아버지의 깃발'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만들어지는
전쟁영웅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광기 어린 전투에
내몰린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전과 다른 전투의 전개와 양상


'이오지마의 전투'는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이 되는데요.. 미군의 무시무시한
물량 공세 앞에 일본은 이오지마가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오지마 수비대의 사령관으로 냉철한 현실주의자인 쿠리바야시 다다이치
중장이 부임하게 됩니다.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중 쿠리바야시 중장

쿠리바야시의 전술은 어차피 이오지마가 함락될 거.. 장기 방어전을 통해 최대한 미군의
희생과 출혈을 발생시켜 본토에 시간을 벌어주면서 일본 본토 상륙을 앞둔 미국에
이오지마에서 지옥을 경험하게 해 상륙작전에 대한 트라우마를 심어주어 일본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을 이끌어내는 것이었습니다.
혹시나 기겁한 미국이 협상에 나서게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도 깔려있었을 것이고요..

쿠리바야시는 전멸을 앞당기는 옥쇄 돌격을 금지하고 가능한 한 오래 병력을 유지하면서
집요하게 전투를 지속하는 지침들을 만들어 숙지시키는 지극이 이성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패망 직전의 상황에서 이에 맞지 않는 유능한 지휘관이 투입되면서 전쟁터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었고 일본과 미국 양측에 지옥도를 안겨주게 된 것이었습니다.

쿠리바야시의 전술


일반적으로 상륙작전을 실시할 때는 해안에서 육지로 상륙하는 바로 그 시점이 상륙하는
입장에서 방어가 가장 취약하기 마련입니다.

이오지마를 향한 함포사격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항상 상륙전 전함들을 동원해서 대구경 함포로 해안선을 공격하고
함재기로 폭격을 가해 해안에 설치된 방어선 철저히 무력화시켰는데요.. 쿠리바야시는 대응
전술의 문제점을 바로 파악했습니다.

쿠리바야시는 해안선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대신 해안 안쪽으로 병력을 빼고 거대한 땅굴로
연결된 탄탄한 방어망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의미 없는 만세 돌격 대신 최대한 살아남아 저항하도록 명령하는데요..
이 결과 미국은 이오지마에서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으로 움직이는
일본군을 맞이하게 됩니다.


미국의 행동개시


1944년 6월부터 무려 9개월 동안 미국은 이오지마에 폭격, 포격을 가하지만 일본은 미 해군에
의해 해안이 봉쇄된 상황에서도 지하동굴에 틀어박혀 악착같이 이 공격을 버텨 냅니다.

미국은 막상 상륙을 앞두고는 포탄이 부족해 상륙부대의 요청대로 9일간의 포격이 이루어지지
않고 3일 간만 포격이 있었는데요.. 사실 9달 동안 폭격을 했는데 6일간 더 포격을 한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던 상황이기는 했습니다.

미 해병대는 이오지마 점령에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을 하고 있었는데요..
일단 상륙을 하면 일본군들은 어둠을 틈타 만세 돌격을 해올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오지마에 상륙하는 미해병대

하지만 정작 미 해병대가 상륙할 때 일본군은 전혀 공격해 오지 않았고 밤에도 지하 벙커에서
꿈쩍하지 않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상륙부대 3개 사단이 해안선에 진지를 구축하면서 모래사장에 발일 묶여있던
바로 그때 일본국의 총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지옥도 이오지마


개전 첫날 미국 해병대원 2,500여 명이 전사 및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했고 일본의 이오지마
수비군 22,000 명중 살아남은 사람은 5,000 명도 채 되지 않았는데요..

이오지마에 상륙한 미 해병대

이 상황에서도 일본의 포로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일본군은 처절하게 저항했고
미군도 이들을 그냥 살려두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미군은 화염방사기로 동굴을 통째로 태워버리거나 폭탄으로 쓸어버리거나, 불도저로 아예
메워버리기 까지 했다고 합니다

화염방사기 공격중인 미군

지연전을 목표로 섬 전체를 요새화 시켜둔 일본은 미군에 완강히 저항했고 특히 타마나 산을
지키는 제2여단은 미군 3,000 명을 희생시키는 바람에 미국은 타마나 산을 우회해야 했는데요...
하지만 타마마 산도 개전 17일이 지난날 전멸당하고 쿠리바야시는 최후의 전투를 준비합니다.

3월 26일 쿠리바야시는 남은 병력 300 명을 데리고 마지막 공격을 감행했지만 실패하고
대부분의 병력과 함께 전사하게 됩니다.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올리는 미 해병

지휘관을 잃은 일본군은 그래도 항복하지 않고 소규모 유격전을 계속 펼쳤고 1,200여 명이나
되는 미군을 사망케 합니다

결국 1주일 만에 끝난다는 전투는 끔찍한 희생자를 만들면서 1개월을 끌었고 이 전투는 최초로
일본군보다 미군의 희생이 더 큰 전투로 기록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오지마와 뒤이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에게 호되게 데인 미군은 쿠리바야시의
의도대로 일본 본토 상륙에 상당한 부담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부담감으로 본토 공격 없이 협상에 들어갈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미국은 항공 전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는 것으로 전략을 변경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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