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사이판 전투와 만세절벽 ! B-29 폭격기 , 절대방어선

기차타고시베리아 2021. 12. 12.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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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 전투


일본이 "전쟁의 패배를 인정해야 해야만 했던 순간이 언제 였을까?" 물어본다면
많은 전문가들은 '사이판 전투'라고 대답한다고 하는데요 이는 사이판이
함락되었을 당시 '후쿠도메 시게루' 해군 중장의 발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이판을 잃었을 때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버렸음을 깨달았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1942년 남태평양 해전 이후 1년 8개월 동안 일본과 미국 사이의 항공모함을 동원한
직접적인 해전은 없었습니다.

이 공백기에 미국은 완벽하게 전시 경제로 전환을 했는데요.. 두 달 만에 한척꼴로
정규 항모가 찍어져 나오는 미국을 일본을 더이상 상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한 이후 인도네시아, 뉴기니, 필리핀, 캐롤라인 제도,
마리아나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로 연결되는 해상 방위 라인을 설정하고 이를
절대 방어선이라고 불렀는데요..

태평양 전쟁 후반기의 이오지마 전투, 필리핀 전투 등이 바로 이 절대 방어선을 중심으로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일본의 절대방어선과 사이판 섬.

괴물 폭격기 B-29 등장


유럽에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던 1939 년 미 육군 항공단 관계자들은 독일 공군을 참관하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되었는데요..

이 자리에서 미국 참관관들은 독일의 폭격기 전력이 만만치 안음을 깨달았고 귀국 즉시
새로운 폭격기 개발을 당국에 건의합니다.

그리고 미국은 이미 개발을 완료한 B-17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보다 훨씬 강력한
무장능력과 장거리 비행능력을 지닌 새로운 폭격기에 대한 개발에 착수하였습니다.

B-29

미 육군의 차세대 폭격기 제작을 맡은 보잉사는 당대 최고의 기술력으로 기체를 개발하기 시작
하는데요 이렇게 탄생하게 된 기체가 바로 최초의 전략폭격기로 인정받은 B-29입니다.

10톤의 폭장량과 , 6,000km에 달하는 항속거리, 9000m의 고 고도에서 작전능력을 갖춘 B-29는
기존의 폭격기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압도적인 성능의 폭격기를 보유하게 된 미 육군 항공대는 1944년 3월 B-29로 이루어진
제20 폭격 사령부를 창설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럽전선은 기존의 B-17 만으로도 충분히 작전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새롭게 개발된 B-29를 태평양 전선에 투입하기로 결정합니다.

B-29 항공대대


하지만 일본 본토를 제대로 폭격하기 위해서는 보급이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일본 전역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새로운 비행장을 확보해야만 했는데요. 이에 미국은
일본 본토 공습을 위한 전진 지지로 마리아나 제도를 지목하게 됩니다.


사이판 침공 계획


1944년 3월 12일 미국 태평양 해역군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6월 15일 마리아나 제도를 공격
하라는 명령을 합동참모 본부로부터 하달받았습니다.

니미츠는 바로 기동 항모 부대인 58 기동부대를 비롯해 지상 발진 항공기로 구성된 57 임무부대
그리고 보병사단과 해병대로 구성된 대규모 상륙부대로 마리아나 제도 침공을 준비합니다.

사이판 섬


사이판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을 대신해서 국제연맹의 승인을 받은 일본이 위임통치를
하고 있었던 중이었는데요. 이후 일본은 약 2만 5천 명의 일본인들이 사이판으로 이주해
오게 되었고 사이판과 주변 섬에는 일본군 군사기지가 건설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이 1934년부터 사이판에 건설한 아슬리토 비행장은 마리아나에서 가장 중요한
비행장이었고 이 비행장이 미군의 주요 목표였습니다.

아슬리토 비행장


사이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일본군 또한 사이판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하는데요..
미국 잠수함의 계속되는 방해에도 마리아나 제도에 약 4만 5천 명의 병력을 집결시켰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한 나구모 중장도 여기에 속해 사이판에 배속되어 있었다고 해요


사이판 상륙작전 결전의 날


1944년 6월 11일 미국의 58 기동부대 함재기들이 제일 먼저 사이판 상공에 나타났습니다.
1000대가 넘는 항공기가 마리라나 제도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사이판 전역을 폭격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미군 폭격기


이어 6월 13일 해안에 접근한 7척의 전함들이 함포사격을 퍼부었으며 야간에는 해안
장애물을 제거해 가면서 상륙작전을 준비합니다.



15일 오전 5시 42분 마침내 미국 상륙부대는 지휘관 터너 제독의 상륙 명령과 함께
300 여대의 수륙양용 장갑차를 이용해 사이판 서쪽 해변으로 상륙을 시도합니다.

사이판 상륙작전


10만 면이 넘는 전체 상륙병 중에서 사이판과 타이안 점령을 맞은 북부 상륙군에
7만 명이 넘는 병력이 할당되었습니다.

해안포격을 위해 11척의 전함이 동원됐으며 항모 함재기들도 사이판 해안을
폭격하였습니다


일본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는데요.. 일본군은 기관총과 박격포, 아포를 동원해 극렬히
저항했고 미군의 전력 손실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항공기와 함대까지 동원된 미국의 화력 앞에 일본군은 서서히 무너져 갔고
결국 해안 방어선이 뚫린 곳으로 미군 기갑전력이 상륙하기 시작해 2만 명의 해병대가
내륙 2km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상륙작전


일본군은 퇴각하면서 산속으로 숨어들었지만 야밤에 게릴라 작전을 시행하며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이때까지도 일본은 필리핀에서 출발한 일본 연합함대만 도착한다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행각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항모가 사이판으로 접근해오자 미국도 58 기동함대를 필리핀 해역으로 보냅니다.
함재기의 항공지원은 급감할 수밖에 없었지만 미국 상륙군은 진격을 계속했습니다.

상륙중인 기갑부대


야습에서도 성과를 올리지 못한 일본군은 비행장을 포기하고 결국 사이판 중부의
산악지대로 후퇴하게 되는데요 여기에 일본의 연합함대마저 3척의 항모를 잃고 퇴각하자
일본 대본영은 사이판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사이판의 일본군


사이판의 일본군은 이제 증원이나 지원 없이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산속으로 숨어든 일본군과 몇 차례 혈전이 치러진 이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기로 합니다.


반자이 돌격과 만세 절벽.


7월 7일 오전 4시경 일본의 잔존 병력이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는데 여기에는 부상병과
민간인들도 속해 있었습니다. 돌격에 참가한 대부분이 전사했으며 미국 측에서도
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부하에게 최후의 돌격을 명령했던 나구모 준장도 며칠 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2일 후 미국 상륙군 지휘관 터너 중장이 사이판 점령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되며
이것으로 사이판 전투는 미국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전투는 끝이 났지만 사이판에 거주 중인 일본 민간인들에게는 끔찍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생존자들이 심리전에 동원되는 것을 우려해 일왕 히로이 토의
칙령으로 사이판에 남겨진 민간인들에게 자살을 권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이판섬에는 만세절벽 ( 반자이 크리프 ) 이라는 장소가 유명하다고 하지요..
태평양 전쟁 당시 사이판 섬에 이주해 있었던 수만흥 일본인들은 이 절벽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한 군사보고서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앞에 있는 아이들을 던 지거나 아이들을 끌어안고 들쑥날쑥한 바위들이 있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마피 주변을 순찰하는 순철선은 바다에 떠있는 시신들 때문에
서서히 운행해야만 했다"

만세절벽과 그 앞에선 아키히로 일왕부부


일본의 드리우는 낙조


일본이 절대 사수를 이쳤던 절대 방어선의 뚫렸습니다.
사이판이 함락되면서 절대 방어선이 뚫렸다는 것은 초장거리 폭격기인 B-29의 사정권 안데
들어가게 되었다는 의미였습니다.
( 정말로 시아 판이 함락된 이후 일본은 도쿄 대공습에 시달리게 되었고 원자폭탄에도
당하게 됩니다.)

일본에 더 이상 희망은 없었습니다. 만약 일본이 이때라도 정신을 차리고 종전 협상에
나섰다면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알 수 없었겠지만 일본은 결사 항전을 선언했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줬습니다.

'가미가제'라고 불리는 이 미친 짓은 메이지 유산 이후 이어진 제국주의 일본이 내지른
마지막 비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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