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팔 작전의 시작
1942년 5월 일본은 아시아 전역에서 날뛰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동아시아를 점령하고
있었는데요.. 애들 손목 비틀듯 미얀마까지 장악해 버린 일본은 내친김에 인도까지
점령해 버리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영국이 유럽에서 독일을 상대하기도 버거운 상황이었으니 그 틈을 노리려고
했던 것이였지요..
일본 입장에서는 어느정도 인도가 공략된다면 인도에서 독립을 위한 반란을 일어나
영국에 대항할 것이고.. 그럼 손쉽게 인도에서 영국을 몰아내고 자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이 신경 썼던 것인 인도 , 뱅골만, 미얀마를 통해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연합국의 보급이었는데요..
중국과의 중일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으로
들어가는 연합국의 보급을 반드시 끊어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군 물자의 집결지 이기도 하고 철도 교통이 요충지였던 임팔
지역을 공격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 바로 임팔 작전이었습니다.
숨은 독립군 무타구치 렌야
임팔 작전의 지휘를 맞은 사람은 '무타구치 렌야'인데요.. 중일전쟁을 일으킨
'노구교 사건'당시 이를 묵인했던 그 '무타구치 렌야'입니다.
일본에서는 일본을 패망으로 이끈 삼대오물중 하나로 알려져 있고
한국에게는 독립을 앞당겨준 숨은 독립군이라고 불리기도 한 무타구치 렌야..
무타구치 렌야는 3개의 보병사단과 1개 탱크 연대를 중심으로 해서 남쪽과 동쪽에서 임팔 지역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두 개의 보병사단이 임팔 지역을 공격하고 그사이 다른 한 개 사단이 임팔 북쪽에 있는
코히마 지역을 점령해서 연합군의 지원로를 차단한다는 작전이었는데요..,
단숨에 임팔 지역을 점령하고 영국군의 보급을 빼앗아 물자를 보충한 뒤 인도 방면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보급을 따로 받지 않고 적에게 뺏어서 쓴다는 일본군의 작전은 일본이 필리핀에서
맥아더를 쫓아낼 때와 같은 내용인데요..
더구나 임팔지역의 경우 버마에서 임팔까지 가는 도로가 따로 없었고 철도 등 물류 인프라도
거의 없었습니다. 거기다 그 사이는 모두 정글로 되어 있어서 일본군은 임팔지역을 점령
할 때까지 모든 장비와 식량을 직접 몸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당시 작전 기간과 9만 명이 병력을 생각했을 때 보급품은 56만 톤 정도 었는데요..
이 56만 톤을 모두 사람 손으로 옮겨야 했조... 그것도 정글을 뚫어가면서...
임팔 지역의 제공권도 연합군 쪽에 있었기 때문에 항공지원도 불가능했고.
사실상 한번 발을 들이면 재보급을 받는다는 것을 볼가능 했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던 일본이 현장 지휘관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채로 이
무모한 작전을 극구 반대했는데요..
이렇게 들어가면 다 굶어 죽을게 뻔하다는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무타구치 렌야는 한 달 안에 작전이 끝날 것이라 생각을 하고 성공을 확신했는데요..
그러면서 뱉어놓는 말들이 참으로 주옥같습니다.
"보급은 현지 조달하면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의자와 정신력이다"
" 만약 예비계획을 준비하면 병사들이 작전이 실패할 것이라고 알고 사기가 저하될 것이다
우리에게 예비계획 따위는 필요 없다".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다 보급이 부족하면 길가의 풀을 뜯어먹고 가라 "
설상가상으로 반신반의하던 일본의 대본영에서도 이 작전을 허가하고
1944년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되게 됩니다.
당시 영국도 일본이 임팔 지역을 공격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 이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요..
" 설마 이 미친놈들이 정말 정글을 넘어오려고 하는 걸까?" 의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일본군은 예상보다 더 미친놈들 이였으니 이들은 일본군에서 딱 3주간의
보급품만 지급하고 전장으로 내몰았습니다..
무타구치 렌야는 3주면 임팔 지역을 점령하고
의지가 약한 영국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작전 개시
초반 버마 지역 도착까지는 순조롭게 이어진 일본군이 작전은 정글지대에 들어서자마자
온갖 어려움에 직면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부대의 물자가 벌써부터 부족하게 된 것이 조.
무다구치 렌야는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병사들에게 물자를 수송할 때 쓰던 소, 말까지도
잡아먹으면서 계속 전진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진격을 계속하던 일본군들 앞에 친드윈강이 나타납니다.
일본군은 이 강을 건너면서
그나마 남아있는 물자의 반을 잃어버리는데요.. 엎친데 덮친 격이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무타구치 렌야는 무조건 전진을 명령합니다
그렇게 힘들게 힘들게 정글을 뚫고 지나 임팔 지역에 도착한 일본군이 맞닥뜨린 것은
이미 알고 대기하고 있었던 엄청난 화력으로 무장한 영국군이었습니다.
사실 일본군은 영국군은 중국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실상 맞닥뜨려보니 공격하는 족족 영국군에 의해서 격퇴당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3월에 시작된 일본군의 작전은 4월 중순이 넘어가도 이렇다 할 성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문제는 3주 치 밖에 준비하지 않았고 이도 정글을 지나며 반이상을 날려먹은 보급품이었습니다.
이쯤 되니 총에 맞아 죽는 병사보다 굶어 죽는 병사가 더 많아지기 시작했고 싸울 총알도 없어지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의 폭격은 연일 계속되고.. 비가 오기 시작하면서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도
퍼지고.. 일본군은 총체적인 난국에 빠지게 됩니다.
이쯤 되면 실패를 인정하고 철수하는 것이 맞겠지만 우리의 무다구치 렌야는 계속해서 진격을 명령합니다.
일본군이 처해 있는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영국군은 5월이 넘어서면서 반격을 시작하는데요..
일본군은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밀려나게 됩니다.
그나마 코히마 지역 점령을 성공한 일본군 31사단의 사토 중장은 밀려오는 영군 국 앞에서
결국 군법상 사형까지 각오하면서 항명을 결심하고.. 자신의 31사단을 후방으로 후퇴시킵니다.
이를 시작으로 각 부대가 퇴각을 요청하게 되었고
7월 3일에는 모든 부대를 철수 시킴에 따라 처절했던 임팔 작전은 중지되게 됩니다.
보급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 부상자들은 그냥 버리고 철수했다고 하고요.. 철수 과정에서도
너무나도 많은 아사자와 병사자가 발생해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합니다.
영국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지켜보니 너무 많은 시체가 쌓여있어 추격을 멈추고 이를 다
소각했다고 하니 정말 처참한 수준이었던 것이었나 봅니다.
임팔 작전으로 인하여 9만 병의 병사 중 3만 명이 전사하고 2만 5천 명이 전투 불능자가 되었는데요.
전사자의 대부분은 아사나 병사였습니다.
일본은 이 작전의 실패로 인해서 버마를 지킬 병력이 부족해지게 되었고 버마 전선은 빠르게
무너져 내리게 되고 1943년 3월에는 버마를 완전히 연합군에 내어주게 됩니다.
일본이 패망하는 데는 무다구치 랜야의 공이 아주 컸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렌야는 전후 전범재판시 불기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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