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얄타 회담, 카이로 회담, 카사블랑카 회담. 그들만의 외교전쟁.

기차타고시베리아 2021. 12. 29.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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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을 대하는 각국의 속내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우발적 충돌이나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전쟁도 있지만 대부분 전쟁은 정치적 이유로 시작되는데요.. 이렇기 때문에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종전은 어떨까요? 종전도 마찬가지로 매우 정치적입니다. 전쟁의 시작점이
군인이었다면 전쟁의 끝에는 항상 정치인이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개전보다
종전이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합니다.

전쟁 기간동아 쌓인 수만은 경제적 문제과 악감정들 그리고 전후 처리 문제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이 때문인데요.. 한국전쟁의 종전선언이 아직도 이루어 지지 않은 것만
봐도 종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 알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은 세계대전을 어떻게 수행할지, 전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했는데요.. 연합국 간 외교 회담은 세계의 외교사에 손꼽힐 만한 유명합니다.

베를린 국회의사당에 깃발을 걸고 있는 소련군

소련은 유럽에서 독일과 싸우고 있었고 미국은 유럽에서는 독일과 태평양에서는 일본과
싸우고 있는 상황이였던 1945년, 독일의 패전이 역력해지자 연합국은 각자의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독일이 무너지자 소련의 대일본 참전 시기가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되었는데요..
전쟁 기간 동안 연합국의 회담에서 일본과 관련된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한번 살펴봤습니다.

1. 카사블랑카 회담


1934년 1월 14일 부터 24일까지 개최된 회의로 주요 의제는 시칠리아 상륙작전의
수립이었지만 다른 중요한 부분은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였던 '앙리 지로'와 '샤를 드골'을
화해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알리지로, 루스벨트,샤를드골, 처칠

아무튼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나온 것 중에 정치적 의미가 큰 부분은 바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있을 때까지 전쟁을 수행한다는 대목이었습니다.

연합국은 처음으로 '무조건 항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인데요.. 이들 국가의
전쟁 능력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겠다는 뜻이었습니다.

2. 카이로 회담


테헤란에서 회담을 가지려고 가는 도중에 루스벨트와 처칠이 카이로에서 중국의 장제스와
회동하면서 이루어진 회담입니다.

이 회담을 통해서 장제스는 처음으로 연합국 전쟁 수행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여기서
결정된 사항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영국은 독일이 패망한 뒤에도 대일본전을 계속한다
둘째, 1894년 이후 일본이 침탈한 지역을 모두 환원한다. 이로 인해 만주와 타이완은 중국에
환원되고 한국은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고 합의하였습니다.

3. 얄타회담


1945년 2월 4일부터 12일까지 소련 흑해 연안 얄타에서 있었던 회담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와 와 외교장관 군사참모들이 모두 참여한 회의로 어떻게 보면
현재까지의 국제정세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아주 중요한 회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회담은 비밀로 해둡시다. 전 세계 많은 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마음대로 자신들의
운명을 제단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매우 불쾌해할 테니 말이오"

처칠이 했던 이 말만 봐도 이 회담의 무게감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얄타회담/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회담은 처음부터 소련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소련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회담 내내 미국과 영국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도청했습니다. 그리고 소련에게는
유럽전선에서의 승리라는 최강의 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소련에 대한 미국 루스벨트의 호의가 더해졌는데요..루스벨트는 전쟁이후 세계평화를
위해 미국과 소련이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련을 매우 우호적으로 대했습니다.
그리고 유럽전선이 정리되면 소련군을 태평양 전선으로 돌려야 했기 때문에 소련의 환심을
사야 하기도 했었습니다.



처칠은 루스벨트를 말렸지만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미 영국은
초강대국의 반열에서 밀려나 미국과 소련의
들러리 신세였던 것이었습니다.

알타 회담의 주요 결정사항은 네 가지입니다.

(1) 국제 연합 창설의 승인
(2) 독일의 분할 점령. 이때 프랑스를 점령국에 포함하느냐는 문제가 쟁점이었는데요..
사실 프랑스는 뭐 한일이 없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 루스벨트가 프랑스의
참여를 인정했고 미국의 점령지에 프랑스를 끼워주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3) 폴란드 전후 처리 문제. 이 부분은 소련의 뜻대로 일루어 졌습니다. 소련과 접한 국경은 물론
독일과 접경한 국경 역시 소련이 일방적으로 정했고 그래도 결정이 되었습니다.

(4)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 소련은 일본전에 참석하기 위해서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는데요..
외몽골의 현상유지,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양여한 권리의 복구, 쿠릴열도를 소련에 할양. 이었습니다
이때 쿠릴열도가 러시아 영토로 되었고 지금 북방영토 분쟁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지요..

출처: https://trans-siberia.tistory.com/entry/쿠릴열도-영토분쟁-진행과정-러시아-vs-일본?category=987796 [평범한 머글의 세상사는 이야기 !!]

아무튼 소련에게 대일본전의 참전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꽃놀이패였습니다.

소련은 얄타회담을 통해 원하는 바를 다 얻었습니다. 루스벨트의 판단력이 흐려져 너무
많이 양보를 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미국은 평화를 위해 소련이 필요했고 일본을 쓰러트리기
위해서 그들의 힘이 필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와 소련이 전행 후의 세계 질서를 결정짓던 그때 일본은 소련과의 중립조약을 믿고
본토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고 자기들 안에
갇혀 살고 있었는데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도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항상 두 눈
부릅뜨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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