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포츠담 회담 , 포츠담 선언. 일본의 마지막 기회

기차타고시베리아 2022. 1. 2.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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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담 회담


1945년 2월 얄타 회담과 1945년 7월의 포츠담 회담은 모두 연합국의 전쟁 지도부가
모인 회의였지만 이 5개월 동안 연합국은 수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연합국을 미국과 영국의 지도자가 바뀌였다는 점이었습니다.
루스벨트는 4월에 죽었고 처질은 선거에서 져 포츠담 회담 중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미국은 부통령 트루먼이, 영국은 새로운 수상이 된 애틀리가 회담에 참석했습니다.
애틀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유명하지요..

포츠담 회담 / 애틀리 , 트루먼 , 스탈린

중요한 건 트루먼이었습니다. 트루먼은 루스벨트처럼 스탈린에게 우호적으로 대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트루먼은 오히려 소련 대일전 참전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스탈린은 얄타 회담에서 얻은 이권을 빨리 챙겨가고 싶었지만 트루먼은 스탈린의
이런 의도가 못 마땅했습니다.



트루먼은 루스벨트가 너무 많이 양보한 탓에 전후 국제 정세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판단했는데요.. 얄타 회담에서 이야기된 대로 진행된다면 만주는 물론이고
결국 동아시아 전체가 소련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얄타회담을 무효화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려면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을 완벽하게 쓰러뜨리고 항복을 시켜야 했습니다.

트루먼은 " 소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일본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이었고
스탈린은 반대로 " 미국이 전쟁을 끝나기 전에 대일전에 참전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트루먼과 스탈린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포츠담 회담 하루 전인
1945년 7월 16일 원자폭탄의 실험이 성공했습니다.

원자폭탄 실험 /트리트니 실험


이제 미국과 영국에 소련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이 내용은 스탈린에게도
그대로 보고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소련에 천황의 친서를 들고 가 평화교섭을 신청했고 스탈린은 이를 트루먼에게
알렸는데요..

트루먼은 간단히 무시했습니다. "일본은 신용할 수는 없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소련에 목을 매는 일본.


1941년 4월 25일 비준된 일소 중립조약은 '5년간 유효하며 폐기 시 1년 전에 통고해야 한다'라는
단서 조항이 있었기에 소련은 1945년 4월 중립조약의 폐기를 공식적으로 통고했습니다.

1941년 일소 중립조약 / 뒤편에 스탈린

일본은 1년 전 통고의 규정이 있으니 1946년 4월까지는 조약이 유효하다고 주장했고
소련도 일단 이에 동의했는데요.. 말뿐인 국제 정치에서 얼마든지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
있음에도 아둔한 일본은 "믿고 싶은 것만 믿겠다"는 아집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원자폭탄이 턱밑에까지 다가오던 그 순간까지 일본은 소련에 대한 희망의 끝을 놓지
못하였는데요.. 일본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고 하면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사실 무조건 항복이 아니라면 소련만이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만약 일본이 소련이 아니라 미국을 대상으로 종전협상에 나섰더라면 핵폭탄을 맞지는
않을 수도 있었고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점점 마음이 조급해진 히로히토 일왕은 종전협상을 결정하고 외교채널을 이용해 소련대사
말릭을 찾아가 읍소하게 했습니다. 만주도 넘기고 어업권도 포기하고 단지 한반도를
점령한 것만 인정해 달라고 졸랐지만 소련은 말릭에게 일본과의 회담을 피하라는
본국의 명령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히로히토는 모스크바로 특사도 보냈지만 너무 바빠서라든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만남을 회피했는데요.. 완전히 거절도 하는 것도 아닌 이러한 모호한 태도는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대일전에 참전하려는 소련의 꼼수였고 일본에게는 희망고문이었습니다.

포츠담 선언.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지도자들의 마지막 회동이었던 포츠담 회담은 주로 독일과
그 위성국가들에 대한 문제에 대해 거론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포츠담 회담이 기억되는
것은 이 기간 중에 발표한 선언이었습니다.

포츠담 선언의 공식 명칭은 '일본의 항복 조건을 규정하는 선언' 이었습니다.
선언문은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냉철하고 단호했습니다.

포츠담 선언문

선언문에서 가장 중요한 항복조건은 이랬습니다.

1. 군국주의의 완전한 배제.
2. 연합군의 일본 본토 점령. 전쟁을 일으킬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발견할 때까지 연합군이 점령
3. 일본 영토는 혼슈, 홋카이도, 규수, 시코쿠와 연합군이 지정한 부속도서로 제한됨.
4. 일본의 완전한 무장 해제
5. 일본인의 자유 보장, 민주주의의 부활, 인권 존중 확립. 일본인을 사람답게 대해주겠다는 것.
6. 연합군에 대한 전범 재판
7. 군수산업 금지, 원자재 수탈 금지 및 수출입 허가
8. 무조건 항복

일본과는 달리 연합국의 말은 애매하지 않고 확실하고 깔끔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천황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에 천황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면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천황이 어떤 의미 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천황제는 건드리지
않으려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즉각 받아들였다면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고
한반도가 둘로 쪼개지지도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만 일본은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미국은 일본이 상식이 있는 나라라면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지만 실제로 일본은
상식적인 나라가 아녔습니다.

결정적 실수. 수상이 묵살 발언



일본 외무성을 포츠담 선언이 일본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전쟁 지도부는 그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수상이었던 스트키도 " 연합국이 최후통첩 카드를 내밀더라도 우리가 "예" 하고 넙죽 항복할
상황은 아니다'라고 했는데요 이는 정세판단이 부족한 게 아니라 아예 없는 것이었습니다.

협상을 하자던 외무성& 해군 세력들과 본토결전을 하자는 육군 세력들의 계속되는 설전을
벌였지만 히로히토는 결국 '일단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되 즉각 수락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서 받아들인다' 것으로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운명이 일본을 버리는 것이었을까요.. 회의 다음날 스즈키 수상이 포츠담 선언을
묵살한다는 내용의 인터뷰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일본어로 묵살을 뜻하는 "모쿠사츠"는 무시하다 와 보류하다 두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었는데
통신사들은 이를 무시하다로 번역해서 방송해버렸던 것이었습니다.

방송사의 영어실력이 문제라고 하기에는 자신의 한마디가 오역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한
스즈키 수상의 실수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77세의 수상은 국제 정치의 무서움을 몰랐습니다.

1945년 7월 30일 자 뉴욕타임스에는 다름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일본, 연합국의 항복 촉구 최후 통첩을 공식 거부하다"



스즈키의 발언은 미국에 원자폭탄 투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어 주었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에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을 안겨줄 것'이라면서
일본에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하는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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