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전멸
트루먼 대통령이 원자폭탄 투하 명령서에 서명한 8월 3일에서 3일이 지난 8월 6일
8월 6일 아침 히로시마 사람들에게는 그리 특별한 날이 아니지만 곧 하늘에 3기의
폭격기가 나타났습니다.
일본인들은 편대가 아닌 3대만 떠있는 폭격기를 보고 정찰용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공급경보가 울려도 그리 크게 반응하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싣고 있던 B-29 '이 놀라게이'호는 혹시 사전에 폭발할
까 봐 이륙 후 하늘에서 마지막 조림을 마친 리틀보이의 폭탄 창을 고도 9,300m 에서
열었고 뒤따라오던 다른 B-29 에서는 동시에 핵폭발 과정을 담을 테이터 수집
장비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8시 15분 히로시마 상공 570m 에서 리틀보이가 폭발합니다.
미국은 작심을 한 상황이었습니다. 진주만 기습공격, 남태평양에서 보여준 일본군의
광신적인 모습,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이 머릿속에 남아있던 상황에서
종전을 위해 포츠담 선언을 최대한 배려해 준비해 주었지만 일본은 이를 묵살했습니다.
계획으로 만 존재했다고 하는 미국의 "몰살 작전"에 의하면 미국은 일본 주요 도시
10곳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50여 개 중소도시에 생화학 가스를 살포하려고 했습니다.
여기다 일본 국토 전역을 6000 여대의 폭격기로 융단 폭격하고 일본 곡창지대에 제초제를
뿌려 농업을 마비시키는 등 일본을 지구 상에서 아예 지워버릴 작정이었지요... 그만큼 미국은
일본에 대해서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히로시마는 35만 명에 달하는 일본에서 여덟 번째로 큰 도시였으나 원자폭탄 하나로
인구수가 절반 가까이 줄었습니다.
일본군 통신병 한 명이 폭발 시 지하벙커에 있다 살아남았는데 그는 즉각 인긴 연대본부에
전화에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히로시마 전멸"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고 16시간이 지난 뒤 트루먼은 이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 일본은 진주만에서 전쟁을 개시했고 몇 배나 되는 보복을 받았다...(중략)
우리는 원자폭탄을 사용했다 그것은 우주의 근원적 힘을 동력화한 것이다...(중략)
우리는 더 강력한 원자폭탄을 대량생산 중이며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
만약 우리의 요구를 거부한다면 하늘로부터 역사상 유례가 없는 파괴의 소나기를
맞을 것이다"
소련에 매달리는 일본과 뒤통수
일본의 군부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습니다. 원자폭탄의
파괴력을 국민이 알게 된다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고 사기가 떨어질게 분명하다는
논리였습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일본 외무성은 소련에 있는 주러일본대사에게 전문을
보냈습니다,
상황이 심각하니 소련에게 종전을 중재해 달라는 내용이었지만 돌아온 건 또 하나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일본이 항복을 거부함에 따라 연합국은 소련에 대일전에 참가합으로써 전쟁을
조기에 종료시키고 더 이상 희생자를 내지 않도록 제안해 왔다... (중략)
이상 과 같은 입장에 따라 소련 정부는 8월 9일부터 일본과 전쟁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을 선언한다"
소련의 선전포고문이 날아든 것이었습니다.
주러일본대가사 선전포고문을 전달받은 시점은 일본 시간으로 8월 9일 자정이었는데요.
소련은 선전포고 후 물밀듯이 만주로 밀려들어 왔습니다.
4년간 독일과의 전쟁을 통해 더욱 강력해진 소련 군대는 준비도 안 돼있고 장비도
열악했던 일본 관동군을 유린하기 시작했고 일주일 만에 1000km을 주파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관동군을 몰아붙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악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요.. 소련군이 밀려 내려오기 시작한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일왕의 결단.
첫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일본의 반응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압도적 신무기 앞에
상항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었는데요..
그나마 일본 전쟁 지도부에서 가장 상식적이었던 시게노리 일본 외무대신은
히로히토 일왕에게 원자폭탄의 성격과 파괴력을 설명했고 8월 8일 포츠담 선언 수용을
권유했습니다.
일본은 8월 7일이나 8월 8일에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는 항복을 했어야만 했습니다.
만약 8월 8일에라도 항복을 했다면 소련군은 참전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번째 핵폭탄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항복 성명을 발표한 것은 8월 15일 이었지요...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을 했더라면 한반도가 둘로 나뉘지도 않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8월 8일 히로히토는 그제야 결심이 섰다는 듯 자신의 안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전쟁을 종결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일왕의 결심이 섰으니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본은 그렇게 이성적인
나라가 아녔습니다.
일왕의 지시 이후에도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는 항복에 대한 갑을논박이 계속됐고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난 후 어전회의로 이어졌습니다.
이 어전회의에서 히로히토는 다시 한번 전쟁 중단을 결심했습니다.
이로써 1941년 12월 8일 시작된 태평양 전쟁이 끝이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단 하나의 항복 조건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는 하나의 조건은
" 일본의 국체 유지를 조건으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였습니다. 국체 유지..
바로 천황제를 유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왕의 결단으로 군부의 반발을 제압하였지만 육군 대신 아나미의 마음을 달랠 수
없었는데요.. 육군대신 아나미와 당시 수상이던 스즈키의 대화는 이러했습니다.
아나미 육군대장 : 만약 미국이 천황의 대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전쟁을 계속할 것인가?
스즈키 수상: 그렇다면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
당시 일왕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가 어땠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인데요.. 국민은 다 죽어
나가더라도 왕을 우선시한다는 당시 일본인들 모습은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이제 종전을 결론이 났고 이를 선포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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