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일본 패망 ! 옥음방송과 쿠데타.

기차타고시베리아 2022. 1. 4. 11:36
반응형

항복 선언

2016년에 일본에서 개봉한 "일본 패방 하루 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일본이
처절히 몰락해 가는 과정과 이를 받아 들이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항복 선언을 저지
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일본의 입장에서 그려져 있습니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락문을 발표했습니다.

".. 제국 정부는 1945년 7월 26일 미, 영, 중국 3국 정상에 의해 결정, 발표되고 이후
소련이 참가한 우리나라에 대한 공동 선언의 제 조건 중에 천황의 국가통치
대권을 변경해야 한다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양해하여 이를 수락한다"

끝까지 일본의 '천황제 유지'에 대한 고집을 확인 할 수가 있었는데요.. 이에 대해 8월 11일
국무장관 번스가 성명을 발표하여 일본의 수락문에 대한 공식 회신을 합니다.

"... 항복한 순간부터 천황 및 일본 정부의 국가 통치 권한은 항복 조항의 실시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조치를 취하는 연합군 최고 사령관의 제한하에 놓인다. "

번스의 성명은 일본시간으로 1945년 8월 12일 일본 외무성 및 동맹통신, 육해군의 해외 방송
수신소에서 청취 되었습니다.

각료회의 / 영화 "일본 패망 하루전 중"


이제 공식적으로 전쟁이 끝나려 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군부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번스의 회신을 받은 육군 참모총장과 해군 참모총장은 일왕을 찾아가 포츠담 선언
수락을 번복해 달라고 요구했는데요.. 일왕도 연합군 사령관의 제한하에 놓인다는 문구 때문에
천황의 대권을 빼앗으려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뒤이어 열린 각료회의에서 육군대신 아나미를 비롯한 군부 강경파는 번스의 회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국체호지 문제를 들고 나왔고.... 회의장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난장판이
만들어졌습니다.


강경파 군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일왕 밖에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히로히토는 이미 모든 걸
결심한 것 같았습니다.

그는 종전을 확실이 인정했고 강경파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습니다.


옥음 방송


종전이 결정되고 각료회의에서 종전의 칙서가 완성되었습니다. 일왕이 직접 국민들을 향한
칙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전쟁을 끝내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14일 오후 궁중에서 녹음하고
다음날 방송하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녹음중인 히로히토


옥음은 왕의 목소리를 뜻하는데요.. 기본적으로 왕의 목소리로 방송을 한다는 것은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일본은 왕조 국가였기 때문에 일왕은 구름 위의 존재였으니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히로히토가 항복을 최종 결정했음에도 군부는 이에 동의할 기분이 아녔습니다.
이 때문에 크고 작은 충돌이 많았고 방송 녹음을 담당한 NHK의 기술진은 일곱 시간 넘게
대기해야 했다고 해요.

일부 군부 소장파 장교들은 궁을 포위하고 NHK 직원들을 납치하려 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녹음된 네 개의 레코드는 궁대성 사무실 금고에 보관되었었다고 합니다.
이 소장파 장교들은 쿠데타까지 모의를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영화 "일본 패망 하루전 중" 소장파 장교들의 모습


NHK는 NG를 대비해 60분 분량의 녹음 레코드를 준비했고 실제 녹음은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히로히토가 첫 번째 녹음을 마친 뒤 다시 해야 하냐고 NHK 기술진에게 물었지만 당시 기술진은
감히 왕에게 한번 더하라고 말하지 못하고 아무 말하지 못했었다고 해요..
결국 정보국 총재가 "평소 하시던 대로.."라고 얘기했고 두 번째 녹음이 이루어졌지만 방송에는
첫 번째 녹음분이 나갔다고 합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방송을 탔습니다.
4년간의 전쟁은 4분 42초 만에 끝이난 것이었습니다..

항복선언 칙렬을 듣고 있는 일본인들

사실 당시 일본인들은 히로히토가 궁중 용어를 너무 많이 사용했기도 했고 라디오 잡음도
심해서 처음에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내용 자체도 항복 선언문이라는 것을 알고 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사실 전쟁에 대한 일왕의
변명으로 볼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1945년 9월 2일 미 해군 전함 미주리 함상에서 역사적인 항복 조인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연합국을 대표해 연합군 최고 사령관 맥아더가 짤막한 연설을 하고 뒤이어 일본 대표인
시케미츠 마모루가 걸어 나왔습니다.

일본군을 대표해 시케미츠와 우메즈 육군 참모총장이 항복 문서에 서명을 했고 맥아더가
연합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서명했습니다.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 조인식

뒤이어 연합국 대표들이 승전국 자격으로 서명하기 시작했고 이 모든 절차가 끝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분 남짓이었습니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일본에게 반성의 기회는 없었습니다. 3000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낳은
일본의 사과는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2년 반에 걸쳐 이어진 재판에서 28명이 기소되어 25명이 실형을 받았고 이중 사형을 구형받은
사람은 7명에 불과했습니다.
죄를 더 캐묻고 싶었지만 냉전으로 이어지는 국제정세에서 미국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일본을 전멸시키려던 미국이었지만 소련 와 공산주의를 막아줄 방패막으로 일본이 필요해졌기
때문인데요.. 국제정치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일본의 성장과 몰락의 과정을 보면서 한나라의 정치와 언론 국민의 의식 수준이 얼만 중요한지
그리고 국제정치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