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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54

국제연맹 ? , 워싱턴 군축회의 !

대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정세는 윌슨이 조직한 국제연맹을 중심으로 움직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1922년 에 진행된 '워싱턴 군축 회의 조약'이 국제정세의 기반이었습니다. 패권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동 중이었고 그사이에 중국의 이권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셈법이 바탕에 깔린 구속력 있는 체제는 허울뿐인 '국제연맹'이 아니라 '워싱턴 체제'였다는 것이지요. 그럼 워싱턴 체제는 무었을까요..? 워싱턴 체제는 해군의 군함 경쟁을 막기 위해 승전국들이 모여 협의한 군축 회담이었습니다.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앞으로의 전쟁은 수많은 물자가 들어가는 소모전이 될 것임을 직감한 유럽 열강은 해군력 증강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영국이 만든 '드래그노트'이라는 무시무시한 전함이 있었습니다. ..

1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기사회생. (파리 강화회의)

"모든 것을 끝내는 전쟁이 될 것이다" - 허버트 조지 웰스 (영국의 소설가) - 1914년 7월 26일 사라예보에 울려 퍼진 한 발의 총성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4년간 938만 명의 병사가 죽고 2314만 명의 병사가 부상당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거의 모든 유럽인이 전쟁을 환영했었는데요.. 전쟁에 대한 기억이 엷어져만 가던 그때 유럽인들은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전장의 공포나 근대의 힘을 보여준 러일전쟁의 공포는 안중에도 없었지요.. 길어 봤자 몇 개월 안데 끝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에 빠진 젊은이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전장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지만 이러한 낙관이 절망스러운 비관으로 바뀐 것은 불과 몇 개월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 소식에 가장 기뻐..

가난한 군사국가 일본과 여전히 고통받는 일본인

가난한 군사국가 일본. 국제정치적으로 러일전쟁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국제정치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라는 대제국을 상대로 거둔 일본의 승리는 여로모로 시사하는 바가 컸는데요.. 일본은 흑선에 의한 개항 이후 불과 60년 만에 국제사회에서 당당히 이름을 내밀 정도가 되었고 아시아에서 최초로 근대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알린 전쟁이였습니다. 또한 100년 넘게 이어져 오던 그레이트 게임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쟁이었으며 슬프게도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 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러일전쟁은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사람들에게도 지옥을 선사한 전쟁이었지요. '203 고지'를 향한 일분군의 '닥치고 진격'은 일본 군부의 무능함을 고..

가쓰라 태프트 밀약,영일동맹 그리고 을사오적

가츠라 태프트 밀약.. 2차 영일동맹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갈 무렵인 1905년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에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는 조항이 있었는데요 " 영국은 일본이 조선에서 가지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이익을 보장하며,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 및 국경 지역에서의 이익을 옹호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내용이였습니다. 영국에 공식적으로 일본의 조선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어요.. 그리고 이 2차 영일동맹이 채결되기 전인 1905년 7월 29일에는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특사인 육군 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만나 협정을 맺었는데요.. '가쓰라 태프트 비밀각서' 라고 불리는 '가쓰라 태프트 밀약'입니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

조롱받는 2021 일본 올림픽! 치사한 일본의 행동

시점을 잠시 현재로 옮겨서 도쿄에서 열리고 있는 도쿄 올림픽으로 돌려보도록 할게요.. ^^ 일본이 또 역사적으로 삽질을 한번 하기 시작하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삽질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ㅋ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도교 올림픽이 드디어 개막을 했습니다. 올림픽 조직위원회 해체 수준 재미있는 것은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거의 해체 수준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조직위원회가 전격적으로 해체를 선언한 것은 아니지만 각종 물의를 일으킨 조직의 수장들이 사퇴를 거듭하게 되어버리면서 책임질 만한 사람이 점점 없어지는 상한 올림픽이 되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개막일 전에 조직위원회가 유명무실 해진다는것 자체가 참 어이없는 일인 것 같아요.. 사실 일본 내에서 올림픽 조직위를 맞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인들 ..

국제사회!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 영국,미국,일본)

적으로 돌아선 영국 미국 일본 "일본은 배상금을 청구하지 않는 대신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섬 및 그 부속도서를 일본에 할양한다 그러나 이지역은 비무장 지역으로 하며 소야, 타타르 해협의 자유항행을 보장한다" 러일전쟁 이후 포스머스에서 만난 러시아와 일본이 합의한 포츠머스 강화조약의 5조입니다. 일본으로서는 날벼락같은 내용인데요.. 러시아가 배상금 지불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배상금이 논의 선상에서 아예 배재된 것이 조.. 일본은 이미 모든 군사력을 소진한 상태였다는 점을 러시아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배상금 때문에 계속 전쟁을 한다면 러시아가 이길 수 있었겠지만 러시아도 국내 사정 때문에 일본에 강화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어요.. 그리고 양측은 서로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습니..

독도 ! 그리고 포츠머스조약 과 조선의 운명

쓰시마 해전이 끝나고 일본과 러시아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였습니다. 러시아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발트함대가 쓰시마 해협에 수장된 마당에 더 꺼내 놓을 카드가 없었고 러시아 내부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의 기운이 돌고 있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엄청난 외채를 엄철 끌어다 썼음에도 전비가 모자랐고 더 끌어모을 병력도 없었습니다. 결국 두 나라는 협상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요.. 여기데 협상을 위해 나선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했을 때부터 계속 러시아를 비난 했고 전쟁 내내 일본을 지원하고 있었는데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러시아와 일본을 주선해서 뉴햄프셔의 작은 도시 포츠머스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하였는데요..

쓰시마 해전 ! 일본을 살린 기적같은 전투.

1905년 5월 25일 짙은 안개가 끼어 있는 대한해협으로 발트함대가 어둠을 틈타 조용히 진입하고 있었습니다. 소리를 없애려 속도도 줄였으며 모든 무전과 등불도 끈상태에서 최대한 조용히 천천히 천천히~ 발트함대는 이렇게 조용히 지나 무사히 해협을 빠져나갈수 있을것 같이 보였습니다. " 발트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가는 순간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절대 이기지 못한다 " 영국마저도 긴장할 정도의 강력한 전력으로 수백년간 러시아의 가장 막강한 해상전력으로 군림해온 발트함대 !! 수병들의 숙련도는 영국 해군과 비견될 정도였고 지휘관이였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자타가 공인하는 러시아 최고의 해군 지휘관 이였습니다. 220일간 2만9000킬로미터를 항해해온 러시아 발트함대는 애초에 목적이였던 극동함대와의 합..

발트함대의 기적의 항해 (지구 한바퀴)

러일전쟁이 한창 격화되던 시점!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황제는 발트함대의 출전을 결정했습니다. 어렵게 편성된 총 38척의 전투함에 수송선 26척 승무원만 1만4000 명을 자랑하는 대함대는 아시아로 향했는데요... "세상이 시작된 이래 어떤 군함도 시도한적 없는 항로" 발트함대의 태평양 진출항로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발트함대는 지구 3/4을 돌아 220일간 2만 9천 km를 항해해야 했는데요.. 한 척의 낙오도 없이 이 항로를 이동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였고.. 이를 지휘한 지휘관 '로제스 트벤스키' 사령관 에게는 찬사가 쏟아졌다고 해요.. 석탄으로 배를 움직여야하는 시절이었으니 관건은 석탄의 보급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 질 좋은 무연탄을 보유하고 있던 나라는 일본의 동맹이었..

UNCTAD 선진국 대한민국과 1905년 대한제국

얼마 전 놀라운 소식이 하나 있었습니다.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UN무역개발회의 ( UNCTAD ) 에서 만장일치로 한국을 그룹A 에서 그룹 B로 옮기는데 합의했다고 하는 뉴스인데요 그룹 A 는 개발도상국가이고 그룹 B 는 선진국으로 지금까지 UNCTAD이 생긴이후에 선진국으로 위치가 옮겨진 경우는 57년만에 처음이라고 합니다. 사실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 주도로 세계질서가 개편이 되면서 선진국들은 무역을 통해 경제통합을 이루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개도국 입장에서는 그 경제통합에 들어갔다가는 경제적으로 선진국에 종속될 수도 있는 위험이 있었겠지요.. 그리고 냉전체제 내에서 어느 한쪽으로 빨려 들어 가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언가 지지 기반이 필요했고 이런 이유로 개도국의 요청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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