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한국사 아는척하기 ( 이땅의 사람들)

한나라 고조선 전쟁. 섭하사건과 고조선의 멸망.

기차타고시베리아 2022. 1. 28.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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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의 성장



초한전쟁에서 승리한 유방을 피해 고조선으로 망명 온 위만이 정변을 일으켜 고조선을
차지하고 왕이된 것이 기원전 194년 이었는데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위만이 우선
처리해야 할일은 내부의 안정을 꾀하는 것이었습니다.

내부를 안정시키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외부의 위협을 차단했어야 했어야 했는데요.
이 때문에 위만조선은 당시 중국지역을 통일하고 강력한 지역을 차지한 한나라의 우위를
인정해주고 공물을 바치면서 한나라와 좋은 관례를 유지해 나갔고요 한나라는 발전된 문물을
고조선으로 전수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위만조선은 한나라로부터 전수받은 발전된 철기 문물을 바탕으로 주변의 여러 작은
부족들을 병합해나가면서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후 고조선은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한반도 남부에 있던 '진'나라와 지금의 강원도 지역의
'예나라'등 국가들과 한나라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담당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겨가며 세력을
점점 키워나갔습니다.

하지만 위만 이후 고조선의 왕이 된 그의 손자 우거왕은 할아버지 위만과는 달리 한나라와
대립각을 세우고 다른 나라들과 한나라의 직접 무역을 방해하면서 무역을 독점하려고 했는데요..
이는 한나라에게 고조선을 침략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버리는 셈이 되었던 것이었어요.

 

 

섭하사건.


고조선이 멸망하기 20년 전인 기원전 128년 고조선의 영향 아래 있던 예국의 남녀 20여만 명이
한나라에 망명했는데요 한나라는 이 지역에 창 예군이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합니다. 이 때문에
고조선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졌음을 감지한 한나라 무제는 섭섭하라는 사신을 고조선으로 파견
합니다.

고조선에 도착한 섭섭한 우거왕을 만나 한나라의 지위를 이용하여 협박하고 윽박질렀을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우거왕은 순순히 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섭하는 빈손으로 자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당시 한나라는 법이 엄격해서 황제의 명을 이행하지 못하고 돌아가면 사형에 처해졌는데요..
이를 두려워한 섭하는 배웅 나온 고조선의 관리를 살해해 버리고 돌아갑니다.

섭하사건
섭하사건 재연


한무제는 한나라의 위엄을 보여주고 왔다는 이유로 성하를 요동군 군사책임자로 임명을
하는데요 자신들의 관리를 살해하고 도망간 사신이 오히려 상을 받은 모습은 분명 고조선을
엄청 열 받게 만들었을 것이 분명했을 것 같아요..

고조선도 대단한 것이 한나라를 상대로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요.. 당시 세계 최강 한나라 요동군
지역에 특공대를 보내 이 섭하를 살해해버리게 됩니다.

고조선이 한나라에 무조선 바짝 엎드려야 할 만큼 작고 힘없는 나라가 아닌 어느 정도 맞짱을 뜰만한
강한  나라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 같은데요. 이것이 그 유명한 섭 하사 건입니다.

 

 

한무제의 침공. 고조선의 멸망


이 섭하사건은 고조선을 침략할 이유를 찾고 있었던 한무제에게 좋은 명분이 되어 주었는데요
한무제는 바로 육군 5만 명, 수군 7천 명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고조선 공격을 개시하는데요..

지도


고조선이 정말 대단한 게 1년 동안이나 한나라의 공격을 굳건히 막아냅니다. 고조선은 한나라에
끌까지 항전했는데요.. 결국 고조선이 멸망한 것은 한나라의 군사적 공세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로 망하게 된 것이었다고 해요..

전쟁이 길어지자 고조선 내부는 화친파와 항전파로 나뉘었고 결국 화친파에 의해
우거왕이 살해당하면서 왕검성이 함락당하고 고조선이 멸망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멸망한 고조선 유민들은 주변으로 흩어져 기존의 나라에 망명하거나 새로운 나라를
새우게 되었고 각자 다시 발전을 해나가는데요. 바로 부여, 동예, 옥저, 마한, 진한, 변환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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