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장진호 전투와 하와이 국군전사자 유해 송환.

기차타고시베리아 2021. 10. 2.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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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국군 전자사 유해 송환


얼마 전 하와이에서 국군 전사자
고 김성주, 정환조 일병 두 분께서 고국으로 돌아오셨는데요..

유해봉환 행사를 보는 동안 참 뭉클하면서도
어떻게 하와이까지 가시게 되었을까 궁금했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이 하와이에 가시게 된 이유를
들었을 땐.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더라고요..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국군과
미군은 재열을 정비하고 반격을 준비했는데요..
이때 영남 지방에 살던 두 청년이 미군의 편제에
편입되어 일본에서 훈련을 받고 카투사의
일원으로 미군과 함께 전쟁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 두명의 한국 청년은 인천 상륙작전에 참여하고
미군과 함께 그대로 북으로 북으로 전진했고..
개마고원 장진호까지 가게 된 것이었다고 해요..

공군이 없는 중국군은 한국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맥아더 장군의 생각과 달리
두 명의 한국 청년은 중국군이 개마고원으로
새까맣게 밀고 내려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장진호 전투

장진호는 개마고원 일대의 한 호수 이름인데요..
일본이 전력생산을 위해 인근에 댐을 막아서
만들어진 호수로 소양강을 막아 소양호가 생긴 것 같은 인공호수입니다.

출처 / KSB 역사의 그날 화면 캡쳐


북쪽으로 북한군을 밀어내며 올라간 미국 최정예
해병 1사단은 이곳 장진호에서 중국군을 마주하게 되었는데요...

중국군이 밀려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미국 해병 1사단과 중국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 경험이 많았던 중공군 제9병단은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17일 동안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중국군이 기다리고 있던 장진호에
미군이 스스로 걸어 들어간 형국이였는데요..
12만의 중국 제9병 사단은 장진호 주변을 빠르게
포위하고 미군의 보급로까지 차단 하게 됩니다.


독 안의 든 쥐가 된 미군은 전멸 아니면
모두 포로로 잡힐 수밖에 없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요,,

개미 고원의 혹독한 추위 앞에 얼어붙어 있는
장진호를 바라보던 미군 해병 1사단은
좁은 산악지형을 돌파해 흥남부두로 퇴각하는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요..
육상의 퇴로가 막힌 상황에서 마지막 남은 방법이
흥남부두를 통해 배로 빠져나오는 것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흥남부두로 가는 길은 좁은 산길을 따라
길게 늘어져서 가야만 했고..
겹겹이 길목을 지키고 있거나 매복하고 있는
중국군과 싸우며 100km를 행군하여 빠져나간다는
것은 사실 자살행위에 가까운 무모한 작전이었습니다.


성공확률이 현저히 낮은 고난도 철수 작전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공군 지원, 포격 지원
부상병 후송 등이 계획에 맞춰져서 딱딱 진행이
되어야만 했고 거기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야 하는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 전투에서 사망하는 병사보다 추워서 동사하는 병사가 더 많았다고 해요..)

장진호 전투의 미군

하지만 미국의 해병대는 이 어려운 전투를 결국 해내고야 마는데요..
17일 동안 추위 속에서 겹겹이 쌓여있는
중국군의 포위를 뚫고 기어이 흥남부두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라는
노래에 나오는 흥남철수작전이 시작되는 것이죠.

흥남부두를 폭파하고 철수하는 미군함


이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의 피해는 전사자 718명
후송 후 사망이 98명 , 실종 192명, 부산 3504명 이었는데요..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 지휘관이 한 병사에게
크리스마스에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뭐냐고 물었는데
그 병사는 "내일"이라고 했다는 일화는
장진호 전투는 극한의 상황에서 치러진 최악의
전투였던다는 것을 알수 있게 해준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슴 아픈 것은 실종자 192명 중 처음에
이야기한 부산에서 미군으로 착출 된 두 명의
한국인 청년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두 명의 전쟁영웅


미국 와 북한은 서로 상대국의 유해를 발굴하여
고향으로 보내주는 유해발굴 및 송환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장진호에서 발견된 미군들의 유해가 미국으로 많이 송환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도착한 유해를 검사해 유가족에게
알려주고 있었던 미국 유해발굴 조사단은 두구의
유해의 DNA가 미국인이 아니라 동양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한국에 통보를 하게 됩니다.

한국 유해발굴단은 등록되어 있던 전쟁 실종자
유가족 DNA를 검사해 결국 유가족을 찾아냈고
두 분의 전쟁영웅은 7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유해 봉환 행사에서 헌화하신 어르신들이 바로
두 분의 따님들 이였던 것이었는데요..

어린 딸을 두고 전장으로 나선 두 분은 70년만에
백발의 할머니가 된 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다시 그 장면을 보니 정말 울컥하더라고요..

먼길을 돌아오셨지만 이렇게라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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