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러일전쟁 개전(開戰) ! (일본의 기습 공격 후 선전포고)

기차타고시베리아 2021. 6. 29.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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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는 간사하기 짝이 없어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순진 장군님.'

이순신 장군님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 관리가
'일본이 전쟁을 멈추고 돌아가려 하니 더이상 공격을
하지 말라~' 라는 말을 하자
이순신 장군께거 하신 말이라고 하조

사진출처 jtbc

일본은 언제나 상대방의 뒤통수를 친 뒤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비신사 적이고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을 행동이지만 딱히 제재할 수 있는 수단도
없었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시작하면서도 선전포고 보다
기습 공력을 먼저 감행하였습니다.

러시아와 협상 중지를 선언한 1904년 2월
러시아는 사실 일본이 아무리 어리석다 해도
선전포고도 없이 러시아에 전쟁을 걸어올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영토, 국민 , 생산력 , 공업화, 병력, 경제력 등등
어느 것 하나도 일본이 러시아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입장에서는 일본과의 전쟁이 나쁘지
만은 않았는데요. 내부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었고 가벼운 상대를 제압하면서
지금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해요

하지만 일본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러시아와의
전쟁은 국운을 걸고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의 목표는 청일전쟁 때 청나라로부터
뺏었지만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다시 뱃길수밖에 없었던 뤼순이었습니다.
( 만주로 가는 부동항 뤼순.. )

1904년 2월 4일 수십 척의 러시아 극동함대 함선이
뤼순항을 떠났다는 정보를 받자마자 일본은
제물포와 뤼순항을 목표로 함대를 발진시켰습니다

그리고 2월 8일 뤼순항 앞바다 대련 인근에서
러시아 함대와 첫 교전을 실시하여
다시 뤼순항 안으로 밀어넣는데 성공하지만
뤼순항 해안포대 때문에 결정적인 타격은
입히지 못하고 뤼순항 봉쇄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때 제물포항에는 수많은 열강의 군함이 정박해
었기 때문에 이들이 일본에 항의를 했지만
일본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 전투 중 피탄을 당해도 책임지지 않는다'

프랑스 종군기자의 풍자화 '러일전쟁'

이제 막 나가기로 한 것이었고 이뒤에는 영국과
미국이 있었으니 가능한 것이었겠지요..

뒤이어 인천항에 5만의 일본 육군이 상륙했습니다.
전격적인 상륙이었고 2월 12일 러시아와 조선은
국교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과 '한일 의정서'를 체결합니다

1904년 5월 일본은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
러시아 육군과 첫 교전을 치렀지만 러시아가
천천히 후퇴했기 때문에 저항 없이
압록강을 건너 진격을 하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의 전략은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
이였는데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도착하는
후속 병력을 기다리기 위해 시간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어요..

일본의 전략은 단순무식 그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뤼순을 함락하라~'였습니다.
뤼순이야 말고 러일전쟁의 핵심 목표였고
승패를 가를 중요한 요충지였던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극동함대를 격파해야 승기를 잡을 수
있고 대서양의 러시아 발트함대가 극동으로 출발 하면
그 기항지를 없애 버려야 했기 때문이었어요..

러일전쟁의 양상은
'발트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느냐..? ' ,
'발트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뤼순을 함락하느냐? '
의 문제였습니다.

러시아 발트함대 함선

일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뤼순을 최대한 빨리
함락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거조..

하지만 뤼순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몇 번의
포격전을 벌였지만 둘 다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급한 건 일본이였이죠.. 일본은 육군이 뤼순
주변으로 치고 들어가 높은 고지를 차지한 후
양쪽에서 항구에 정박해 있는 극동함대를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뤼순항 ( Port Auther )

손쉽게 압록강을 건넌 일본군이 중국 진저우성에
다다랐을 때는 지옥을 맛봐야 했습니다.

러시아의 축성의 달인 '콘드라 첸코 소장'은
맥심 기관총을 촘촘히 배치하고 후방에서 날아오는
중포의 지원사격으로 돌격하는 일본군을
산산조각 내버렸습니다.

진저우성의 전투에서 일본은 3,000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는 일본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줍니다. 근대화된 20세기의 첫 전투는
이전과 전쟁의 양상이 180도 달랐기 때문이에요

맥심 기관총

진지 앞에서 '돌격 앞으로~'가 얼마나
무모한 행동인지 그리고 전쟁에서 무기의 물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일본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어렵게 진저우성과 난산을 통과하긴 했지만
일본은 난산에서 하루 동안 3만 발의 포탄과,
220만 발의 총탄을 소비했는데요 이는 청일전쟁
전 기간에 소비한 물량과 맞먹는 수준이었습니다.

포탄의 재고가 동이 난 일본은 영국과 독일에
긴급 주문을 해야 했고 포탄이 도착하는
12월까지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세계는 이 전투를 지켜보며
대량학살의 시대가 왔음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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