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한국사 아는척하기 ( 이땅의 사람들)

고구려 왕의 계보와 업적 ( 주몽..미천왕.. 광개토대왕,장수왕...)

기차타고시베리아 2022. 2. 13.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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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맹국가 부여 & 고구려..!!



연맹국가로 성장에 성공한 부여와 고구려였지만 사실 연맹국가는 왕이 다스리는 지역을
제외한 다란 부족들이 다시 연합하면 언제든지 왕을 몰아내거나 바꿀 수 있는 형태로
왕권이 강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연맹국가에서 중앙집권 국가로 성징한 고구려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지는데요...
다른 부족들을 압도하는 강한 힘으로 다른 부족의 군장들을 신하로 삼아버린 왕족은
중앙에 권력을 집중하여 직접 모든 부족을 다스리게 됩니다.

이러한 중앙집권 국가의 첫번째 조건은 바로 왕위가 세습된다는 것인데요..
연맹 왕국처럼 돌아가면서 왕을 하거나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자기들 가족들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많아진 백성들을 하나의 왕이 계속 다르려야 하기 때문에 강력한 법이 필요하게
되는데요 조금 멋있게 표현하자면 율령을 반포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다 지금까지 각지의 부족장과 부족민을 끈끈하게 연결시켜주고 있던 원시종교를
깨서 이들의 유대감을 약화시켜야 했는데요.. 이를 위해 한반도의 중앙집권 국가들은
당시 선진 종교로 여겨지고 있었던 불교를 수용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완성된 강력한 왕권과 국력으로 영토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지요..


만주와 한 번도 최초의 연맹국가인 부여는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였는데요..
발전했다고 해도 그 기록이 남아짔지 않아 확인할 수가 없는 수준이라고 하고요..

우리나라에서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한 나라가 바로 고구려 백제 신라였습니다.
학교 다닐 때 역사시간에 고구려 백제 신라를 배우면서 항상 어느 왕 때 부자 세습이
되었네.. 어는 왕때 율령을 반포했네.. 어느 왕 때 불교를 수용했네.. 이런 걸 많이 배우는 게
다 이런 이유라고 합니다.


중앙집권 국가 고구려

주몽 ~ 고국천왕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졸본에 건국을 하는데요.. 부여에 남겨져 있던 주몽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를 합니다.

MBC 드라마 주몽에서 주몽과 유리의 재회


그렇게 이어져 내려오던 고구려에 2세기에 고국천왕이 등장을 하는데요 이 고국 천앙이
드디어 행정 5부를 설치하고 왕위를 부사 세습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타 부족민 반발을
잠재우고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을파소를 등용해 궁휼제도인 진대법을 실시하지요..

미천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명왕


고구려는 4세기의 왕들이 매우 중요한데요..

첫 번째 미천왕은 영토를 확장하면서 지금의 의주에서 압록강 맞은편 지역인 서안 평을
점령 가고 한나라가 만들어 놓았던 낙랑군을 복속하면서 대동강 유역을 확보합니다.

문제는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 시기켠서 낙랑과 맨날 싸우던 백제는 걱정거리가 사라지게
되었고 이게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는 점인데요..


미천왕 이후 고국원왕 시기에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를 공격해 고국원왕이 평양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고구려와 백제는 원수 사이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고국원왕의 아들인 소수림왕은 나라를 안정시켜야 했는데요 이를 위해 불교를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고 인재양성을 위해 태햑을 설립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소수림왕의 조카였는데요.. 소수림왕은 광개토대왕의 큰아버지였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이름대로 영토를 엄청 확장했는데요 백제를 공격해 한강 이북을 장악하면서
할아버지의 복수를 제대로 했습니다.

KBS 드라마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은 후연을 격퇴하고 요동을 확보하였으며 일본 놈들한테 공격받은 신라를
구해주기도 했는데요..

사실 신라를 공격한 세력은 백제, 가야 , 일본( 왜)의 연합세력이었다고 해요.. 위기를
느낀 신라의 내물왕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고 광개토대왕의 기마병은 시원하게 신라를
에워대고 있던 왜군을 발라 버리고 낙동강의 가야까지 공격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신라 경주의 호우총이라는 무덤에서 광개토대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그릇이 발견돼 이를
호우명 그릇이라고 하는데요.. 신라에서 광개토대왕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광개토대왕은 다른 말로 영락 대제라고 하는데요.. 이는 광개토대왕이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연호를 사용해야 진정한 자주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지요..



4세기에서 5세기로 넘거나는 시기를 보낸 광개토대왕이라고 하면 5세기는 장수왕의 시대
입니다.

장수왕이 이전보다 좀 더 남진 정책을 써서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을 때 중국은
남북조시대를 보내고 있었는데요..


고구려의 남하로 위기를 느낀 백제의 개로왕이 중국의 북위에서 도와달라는 국서를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북위는 이를 바로 고구려 장수왕에게 알렸고 안 그래도 증조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였던 백제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장수왕은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을 잡아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한강유역 일대를 장악하게 되는데요. 이때 충주에 중원고구려비를 세우게 되고요
내친김에 국내성이 광개토대왕비도 세우게 됩니다


장수왕의 아들인 세자는 장수왕이 너무 장수하다 보니 왕위를 이어받지 못하고 그 손자가
왕위를 이어받는데요 바로 고구려 21대 왕 문자명왕입니다,.

문자명왕은 명맥을 이어오고 있던 북부여를 점령하는데요.. 고구려에서 영토를 가장 많이
넓인 왕은 광개토대왕이지만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한 왕은 바로 문자명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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