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료마와 삿초동맹에의해 에도막부의
시대가 막을내리고...일본은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200여 여개의 지방 번들은 다이묘들이 직접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번들은 독자적인 재정으로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고 무사들은 여전히 급여를 받고 있었어요.
사쓰마, 조슈의 젊은 무사들이 주축이 된
삿초동맹과 메이지 정부는 권력을 중앙에서
장악해야 했었는데 그러려면 다이묘들이 아닌
중앙에서 파견한 공무원들이 직접 세금을
징수하고 관리해야만 했습니다.
덴노는 번을 폐지하고 현 행정구역을
설치하려고 했는데요 이렇게 하려면 모든 토지와
백성은 모두 덴노에게 반납되어야 했어요.
다이묘들은 토지와 농민을 모두 덴노에게
반납하는 대신 거액의 보상금을 받고
자기가 다스리던 지역에서 나오는 세금의
10%을 지급받게 됩니다.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직접 지역을 다스리며
비용을 감내하는 것보다 이득이었기 때문에
이에 동의하게 되지요..
이렇게 땅과 농민을 덴노에게 돌려주고
1871년 일본은 번을 폐지하고 지금처럼 '부현'
체제를 실시하게 되는데요..
이때 덴노의 편이었던 가고시마, 후쿠오카,
히로시마, 아키타 번은 현으로 바뀌어도 이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덴노의 반대편에
있던 번들은 과거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다카마스' 번은 '가가와현'으로
'다카사키 번'은 '군마현'.. 등등으로 바뀐 것이
반대편이 번들이었던 것이였습니다.
이렇게 제도를 정비한 일본 정부는 앞으로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 나갈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데요.. 이들은 서양의 열강을 배우기
위해 대규모 사절단을 미국 와 유럽으로 파견
하는데 이들이 바로 '이와쿠라 사절단'입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1871 년 107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요.. 평균 연령 32세로 젊은
사람들이었고 메이지 정부는 그해 재정수입의
2%라는 막대한 비용을 들일만큼 이 사절단에
공을 들였습니다.
이중 46명은 메이지 정부의 고관들로 정부 관료의
50%가 넘는 수준이였습니다. 여기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해요..
사절단은 유럽을 순방하면서 유럽 열강의
국가제도, 기구, 경재, 산업, 군사,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에 대해 배우고자 했는데
이는 사절단의 보고서 '미구 회람 실기'에 잘
나와 있다고 합니다.
일본은 국가발전 모델로는 독일의 정부 주도식
공업발전을 통한 압축성장을 가지고 는데요
당시 독일의 제상이 바로 철의 제상 '비스마르크'
였습니다.
사절단은 각 나라들의 훌륭한 점을 골라 배우기로
하였는데요.. 육군은 독일을, 해군은 영국을
따라 했습니다. 그리고 스위스와 벨기에, 네덜란드
에서는 교육과 자주성의 중요함을 배워왔다고 해요..
이러한 국가 주도의 대대적인 시찰단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22개월 동안 유럽 따라 하기를 연구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일본을 되돌아 온 다음 일본을
뿌리째 바꾸려고 합니다.
먼저 계급을 철폐하고 직업선택과 계급간 결혼을
자유롭게 만들었고요..
무사들 만이 아닌 모든 국민들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게 됩니다.
평민들에게도 세금을 걷고 군역를지게
하려니 이름만 가지고는 사람 구분이 어려웠는데요
그래서 이때부터 무사계급 이상들만 가지고
있던 성씨를 평민들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씨를 만드는 방식이
사는곳이 어디인가 에 따라 만들었는데요
산속에 살면 아마나카, 밭에 살면 다나카
약수터에 살면 고이즈미.. 이런 식이였어요..
그리고 서구식 교육제도를 실시해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설치하고 6세 이상의
어린이의 소학교 진학을 의무화했습니다.
또..지폐를 발행하고 조세제도를 고치고,
철도를 부설했으며 단발령을 내리고
육식을 장려하는 등 하나부터 열까지 유럽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유럽을 미치도록 동경하는 일본인의
습성이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 세계에서 일본인만이 가지고 있다는
'파리 증후군' 이 다 이때부터 그들의 머릿속에
심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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