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웅번의 성장과 일본개항 쿠로후네 사건.

기차타고시베리아 2021. 5. 2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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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로쿠 호황의 시대를 지낸 일본은 이대로
계속 발전할 것처럼 보였지만 잦은 자연재해와
기근으로 인해 농민반란이 일어나는 등 문제가
자꾸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자연재해로 쌀값이 폭등하면 조닌 계급의
계급의 삶이 힘들어졌고..
월급을 쌀로 받아 돈으로 바꾸어 생 활을하던
무사계급은 반대로 쌀값이 떨어지면 살기
힘들어지게 되었거든요..

막부의 쇼군과 지도자 들은 이런 상황을
이겨 내고자 여러 가지 정책들을 시행하면서
성장과 정체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다 1833년 집중호우와 냉해로 또 다시
식량부족에 직면한 일본의 농민들은 봉기를
일으키게 되는데요 당시 매일 200 명씩
죽어나갔다고 해요..

이때는 무사들까지 반란에 합류하게 되는데..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막부는 엄격한
풍속 통제와 물가 통제를 이어나갔지만 막부의
계획은 실패를 끝이 나게 됩니다.

막부의 실정이 계속되자 지방의 다이묘들도
번을 운영하기가 어려워졌지만 이와 중에도
스스로 개혁을 이루어 내고 힘을 기르는
번들이 생겨나는데요..
조슈번, 사쓰마번 , 히젠번 , 조사번들이 바로
그들 이였습니다.


이들은 기존의 젊고 유능한 하급무사들을 대거
등용하는 등 파격인 개혁을 이뤘는데요..
상업을 중시하고 금융업과 유통업을 활성화하는
등의 방법으로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그 수입으로
대포를 제조하는 등 군비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었어요..

이런 번들을 '웅대한 번국'이라고 해서
웅번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외부에서는 산업혁명을 이룬
유럽의 열강들이 개항을 요구하며
일본으로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부의 쇼군은 중국을 제외한 타국의
배가 나타나면 바로 격퇴하라고 명령하고
실제 미국의 상선에게 포격을 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1842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영국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막부는 크게 놀랐고
이국선 격퇴령을 철회하며 이국선이 요구하면
식사와 연료를 공급하라고 입장을 바꾸게 됩니다
전형적으로 강자에 약한 스타일이네요..

특이한 건 처음에는 동방 예이지 국답게 이양선에게
식수와 연료 등을 제공하고 잘 돌려보내 주던
조선의 경우 같은 소식을 듣고 '양이가 청나라도
때려잡을 만큼 흉악 하며 천주교를 퍼트리는
나쁜 놈들이다'는 인식으로 문을 걸어잡그게 됬다는거조.
양국의 초지가 정 반대였던 것이였습니다.

이때 서부개척에 마무리하고 하고 아시아 진출을
노리던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이었던
페리 제독이 드디어 1853년 미국 군함 네 척을
이끌고 에도만 어귀에 도착하게 됩니다.

페리 제독은 통상, 연료와 음식 제공 및 자국선들의
보호를 요구하고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 많은 배를 끌고 와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는데요..
이 것이 바로 '흑선 내항' (쿠로후네 사건)입니다.

당시 유럽의 배들은 타르로 선체를 검게 칠하고
있었기 때문에 검은 배, 혹은 흑선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였지요.

쇼군은 내년 봄까지만 생각하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페리제독은 이듬에 봄 정말로
7척의 군함을 몰로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이때 일본이 한 행동이 재미있는데요..
미국인들을 불러놓고 스모를 보여줬다고 해요..ㅋ
'우리 이렇게 무서운 사람들이야~'라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요..?

미국은 스모를 비웃었고 결국 일본은
미국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는데요
중국이 영국과 체결한 난징조약과 비슷한
내용이었다고 해요..
이것이 '미일 화친조약'입니다

항구를 개항하고, 관세도 미국이 정하고,
미국인에 대한 재판권도 미국에 있었습니다.

일본이 굴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럽 열강들은
앞다투어 일본으로 몰려들어 조약을
강요하는데요 막부는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와도
비슷한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불평등한 조약은 일본 내 분열을
불러왔고 일본은 개국파와 양이파로 나뉘어
대결을 시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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