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삼국간섭 과 을미사변 ! 그리고 일본의 각성

기차타고시베리아 2021. 6. 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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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4월 일본은 시모노세끼 조약으로
중국 랴오둥 반도를 얻음으로서 본격적으로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 하였습니다.

그러데 조약 체결 6일 후 러시아, 독일 , 프랑스
공사는 일본 외무성을 방문해
" 랴오둥 반도(요동반도)를 일본이 소유하는
것은 청나라 수도에 대한 항구적인 위험일
뿐만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것" 이라는 의견을 전했는데요..
이 사건이 바로 '삼국간섭'입니다.

일본 외무성.. 아니 일본 전체가 이에
매우 당황하고 분노한건 당연했겠조.?

러시아는 만약 일본이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을 차지할 경우 청나라와
연합해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러시아는 급하게 프랑스와 독일을 포섭했고
세 국가가 일본을 압박한 것이었죠..
일본 전체는 분노하였지만 서양 열강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1895년 5월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고
3000만 냥의 추가 배상금을 받는 선에서
사태를 수숩하였는데요..
일본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외교에서 졌기 때문이었어요..

실제로 이 삼국간섭은 일본의 지식인과
정치인, 군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요
일본 국민은 이러한 굴욕을 더 이상
당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통합되었고
강해져야 한다는 목표에 매진하게 됩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탈아입구'를 주장하며
열심히 서양인이 되기를 바라왔지만
서양은 일본을 받아줄 생각이 없다는것을
깨달았고..
그동안 두려워하던 러시아가 이를 주도
하고 있으니 두려움과 모멸감까지 작용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러시아를 가상의 적으로 상정하고
전쟁 준비에 들어가는데요
삼국간섭 직후인 1896년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해 전시동원 병력을 20만에서 60만까지 증강했습니다.
이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완공 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 가능한 러시아 병력을
20만으로 산정했기 때문이었어요...

1899년 진수된 일본의 아사히 전함 (1만5000톤급)

그리고 해군력 증강에도 나섰는데요
청일전쟁 당시 4000 톤급 전함도 없었던
일본이었지만 10년 동안 1만 5000 톤급
전함을 확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청일전쟁의 보상금이 요긴하게 쓰였던
것이었어요..

문제는 이런 삼국간섭이 조선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인데요..
삼국간섭을 통해 러시아의 힘을 확인한
명성황후와 고종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안 그래도 러시아 때문에 눈이 돌아가 있는
일본은 조선이 러시아에 착 달라붙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성을 상실하였는데요..

결국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야만적인 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프랑스 주간지에 실린 을미사변

삼국간섭 이후 일본은 열강들의 각축장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려면 사전에
양해와 동의를 얻어야 함을 뼈저리게 확인하고
외교에 더욱 힘을 기울이게 되었는데요..

이로 인해 조선을 병합하는 과정에서의
일본의 외교는 이전과는 다른 근대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 뜻하지 않게 아주 힘센 동료도
얻게 되는데요.. 바로 영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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