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1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기사회생. (파리 강화회의)

기차타고시베리아 2021. 8. 11.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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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끝내는 전쟁이
될 것이다"

- 허버트 조지 웰스 (영국의 소설가) -


1914년 7월 26일 사라예보에 울려 퍼진
한 발의 총성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4년간
938만 명의 병사가 죽고 2314만 명의 병사가
부상당했습니다.

사라예보사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거의 모든
유럽인이 전쟁을 환영했었는데요..
전쟁에 대한 기억이 엷어져만 가던 그때
유럽인들은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전장의 공포나 근대의 힘을 보여준 러일전쟁의
공포는 안중에도 없었지요..
길어 봤자 몇 개월 안데 끝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에 빠진 젊은이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전장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지만
이러한 낙관이 절망스러운 비관으로 바뀐 것은
불과 몇 개월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1차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 소식에 가장 기뻐했던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일본 정부에서 제일 빠르게 움직인 이는
이노우에 가오루였습니다.
초대 외무대신을 지난 이오우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마자 일본의 참전을
독려했습니다.

"아시아에서 열강의 힘이 빠져나간

이때가 일본의 기회다.
열강이 빠져나간

자리를 일본이 차지해야 한다."


열강이 집안문제로 빠져나간 자리에서
일본은 빈집털이를 생각했던 것이었어요..

일본은 영일동맹을 이용했습니다.
1914년 일본은 영일 동맹을 명분으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말이 참전이지 그냥 독일이 빠져나간
자리를 자기들이 들어가서 그 지역을 차지
하려고 한 것이었어요..

일본 육군은 독일의 조차지였던 중국의
칭다오를 점령하고
해군은 독일령이었던 남태평양의 마리아나,
캐롤라인, 마셜 군도 등을 점령했습니다.

일본육군
칭다오로 향햐는 일본군

칭다오를 점령함으로써 육군은 산둥성으로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고
해군은 남태평양의 재해권을 확보함으로써
미국의 태평양 횡단 루트를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시작을 뿐이었지요..
유럽의 전선이 굳어지고 있었던 1915년 1월
일본은 중국에 21개 조에 달하는 요구사항을
전달하면서 만주 지배를 본격화했습니다.

'21개 조 요구사항'은 거창한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결국 '산둥반도 내놓고.. 만주도 내놔라
중국 제철소도 일본에 넘기고.. 항구하고 섬 등은
다른 나라 말고 일본만 사용하겠다.
뭐 암튼 중국도 일본의 식민 지니까 그렇게 알아라'
이 정도로 보면 맞을 것 같아요..

21개조요구문
21개조 요구문

이 '21개 조 요구사항'은 불평등을 넘어 가혹한
수탈을 강제하고 있었습니다만
일본이 최후통첩을 받은 당시 중화민국의
대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는 결국 이룰
수락하고 말았는대요..

이로 인해 위안스카이는 중국인들의 마음에서
멀어져 갔고 중국의 주권은 일본에 의해
유린당 했고 중국의 반일 감정은 격화되기
시작 습니다. 결국 5.4 운동으로 분출되었지요..

 


아무튼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
불렸던 대전쟁은 유럽 열강을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뜨렸고 유럽은 이네 세계 문명의
중심이 될 수 없었습니다.

국제정치의 주도권은 전쟁의 화마가 비껴간
미국과 일본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 내내 열심히 수출을
했고 그 결과 채무국에서 채권국이 되었습니다.
러일전쟁의 채무로 허덕이던 일본에게
1차 세계 대전은 하늘이 내려준 동아줄이
되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은 엄연한 승전국의
지위로 파리 강화 회의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였는데요..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획득한 권리의 인정이 그것이었습니다.

일본의 주장은 받아들여졌고 그렇게 1차
세계대전의 최대 수혜국은 일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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