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중일전쟁의 시작. 루거우차오 (노구교) 사건.

기차타고시베리아 2021. 8. 25.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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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일감정 격화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이에 대해 중국은 국제연맹에 이를 제소하였고
1933년 실사 조사단의 조사 후 만들어진 "리튼 보고서 채택에 반대를 표시하고 국제연맹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 일본 대표
마쓰오카 요스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나라에나 양보도 타협도 할 수 없는 사활적
문제가 있는데 일본에게는 바로 만주가
일본인의 생사가 달린 양보할수 없는 문제다"

이후 일본은 국제연맹가 워싱턴 조약에 차례로
탈퇴하며 전쟁으로 내달리게 되는 것이지요..

국제연맹 탈퇴를 선안하는 마쓰오카 요스케

1931년 만주국이 세워진 이후로 중국
동북지역에서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중국 내 항일 운동이 거세게 확산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총통 장제스는 먼저 내부의
공산당을 정리하고 일본에 대응하려고
했었는데요 일본의 침탈에 중국 내 반일 감정이
격해지고 동북군 사령관인 장쉐량이 시안사건을
일으키자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내전 중단을
합의하고 일본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두 번째 국공합작을 구축하게 됩니다.

(장쉐량의 시안사건은 장쉐량이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에 찾아온 장제스를 구금하고
국공합작 후 항일전쟁에 나서지 않는다면
풀어주지 않겠다고 한 사건입니다.
장학량이라고 부리는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
쫌 멋진 사람인 것 같아요.. ^^)

노구교(루거우차오) 사건


노구교(루거우차오)는 전략적으로 베이징과
연결되어 있던 중요한 거점으로 사건 발발 당시
일본군은 서쪽을 중국군은 동쪽을 관할하고
있었습니다.

1937년 7월 7일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진영에서
총소리가 한발 울리고 일본 병사 한 명이
행방불명되었는데요.. 병사는 20분 후 다시 부대로
복귀하였지만 일본군을 중국군에게 중국군
주둔지로 일본군을 보내 수색을 하겠다고 요청하지만
중국은 이를 거절합니다.

루거우 차오 다리위 중국군


암튼 일본군은 바로 전투태세를 갖추고 다음날인
8일 새벽 중국군 진지에 포격을 시작하고 공격하여
노구교를 점령하였는데요.. 이거 뭐 짜고 치는
고스톱인 냄새가 너무 진하게 나지요..?

당시 일본군 부대장은 일본을 늪에 빠트려
말아먹은 참 소중한 장교 중의 한 명으로 유명한
"모카 구치 렌야" 였는데요.. 렌야는 없어진
병사를 제대로 찾아보지 않고 상부에 중국군의
소행으로 판단하고 보고 하였다고 합니다.

(렌야는 이후 동남아에서 벌어진 임팔 작전의
책임 자였기도 했는데 일본군 보급이 줄어들자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지요..^^;)


일본은 중국 국민당에 반일단체 일소,
반일활동 금지와 국민당이 모든 사건의 책임을
질 것 노구교 사건과 연루된 모든 장교는
사과할 것"의 조건을 내세우게 됩니다.

일본은 협상이 벌어지는 가운데 이를 침략의
계기로 삼기로 결정하고 중국에 전면적인
파병을 발표했고요..

중일전쟁시 일본군

이에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군은 중국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며 이렇게 중일전쟁이
시작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초반 중국군은 일본의 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렸고 베이징은 8월 28일에 텐진은 바로
그다음 날 함락되었거든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함께 대일본 전쟁에
들어갔고 쉽게 끝이 날 것으로 알았던
일본은 점점 진창에 빠져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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