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홍범도 장군의 귀환 (2).자유시 참변, 러시아 내전, 카자흐스탄

기차타고시베리아 2021. 8. 2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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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 모여든 독립군

간도 참변 이후 간도를 떠난 독립군들은
1920년 12월 밀산 한흥동에 도착을 합니다.

서일이 총재로 김좌진 장군이 사령관으로 있던
북로군정서를 중심으로 1만의 대한독립군단이
밀산부 한흥동에 모여 있을 때 러시아 볼셰비키
측에서 독립군에 제안을 하게 됩니다.

러시아의 독립군

러시아는 군량미도 기지도 무기도 변변치 않은
대한독립군단에게 러시아로 건너오면 자신들이
지원을 하겠으니 여기서 일본과 싸우자는 제안
을 하게 되었는데요..


이때 대부분의 독립군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흩어져있는 독립군들이 한데 모여 통합을 해보자는
취지로 러시아으로 넘어가게 되고 그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자유시 였던 것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당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혁명을
성공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나 기존의 제국주의
세력들과 내전을 하고 있던 적백내전의 시기였어요

러시아 적백내전

일본은 같은 제국주의였던 로마노프 왕조의 편에서
백군의 편을 들어 내전에 참여하고 있었는데요..
당시 일본군 약 7만이 시베리아에 들어와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러시아가 혼란한 틈을 타서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싶었던 것이었겠지요..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독립군들을 끌들여
백군 편에 서있는 일본군을 상대하려고 했고..
식민지를 추구하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식민지였던 나라들을 지원해 독립을 하게 하고
이들을 공산주의 나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습니다.

독립군이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할 때 가난했던
독립군들은 현지의 러시아 인들과 마찰이 잦았고
그러다 보니 이쪽을 담당하고 있던 러시아
극동 정부는 독립군이 무장을 해제하라는 요구를
했는데요.. 이를 거부했던 일부 독립군도 많아
하면서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자유시 참변


간도의 독립군들이 자유시에 모이도록 앞장서서
주도한 인물은 당시 상해 임시정부 초대 총리를
지냈기도 했던 이동휘였는데요..
이들이 이끌도 있던 군대는 "대한의용군" 이었습니다

러시아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들에 대하여 러시아는
이전까지 러시아 땅에 있던 "고려혁명군"을
중심으로 통합을 시키려고 하였고 이동휘가
이끄는 상해파 독립군들은 "대한의용군"을 중심으로
통합을 하고자 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처음에는 "대한의용군"을 지지
했다가 당시 러시아가 "고려혁명군"측에 힘을 실자
누구가 되었던 빨리 독립군이 통합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니 나중에는 통합과 지원이 빨리
될 수 있도록 "고려혁명군"으로 지지를 바꾸었습니다.

이때 이범석과 김좌진은 러시아가 마음에 안 들어
다시 북간도 인근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장군

홍범도, 안부, 최진동, 지청천 등 다수 독립군들이
고려혁명군을 지지하고 있는 가운데
상해파(대한의용군)는 이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고 러시아의 무장해제 요청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에 러시아 볼셰비키 군은 대한의용군을 공격하게
되었고 이때 고려혁명군 일부도 이들과 함께
대한의용군을 공격하는 참변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유시 참변입니다.

대부분의 피해는 "대한의용군" 측에서 발생하게
되는데요..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은 서로 말이
통하니 서로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라고 하면서
전투에 참가하였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소련군은
대한의용군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군의 공격을 받았던 '대한의용군'중
허재욱의 의금부에서만 피해가 발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국사 편찬위원회에 의하면 당시 고려혁명군의
주장으로는 사망자가 36명 발생하였다고 하였고
대한의용군의 집계로는 전투 도중 사망자 및
행방 불명자는 600여 명이라고 하였다고 해요..

당시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이 이 전투에 참여
했다는 기록이나 당시 주장은 없었다고 하고요
우리 독립군들 사이의 충돌로 인하여 사망자가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홍범도 장군은 자신들의
장교들과 함께 솔밭으로 나가 땅을 치고
원통해 했다고 합니다.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이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던
홍범도 장군은 1937년 후배들에게 지위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나려고 하셨는데요.. 이때 이미
홍범도 장군의 나이가 70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소련의 스탈린은 연해주의 한인들이 일본군과
겉모습이 비슷해 혹시 일본과 전쟁을 벌인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연해주의 한인들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시켰고 이때
홍범도 장군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끈질긴 한인이 생명력은 중앙 아사에서도 뿌리를
내렸고 힘든 생활 속에 극장도 만들어지게 되는데요
홍범도 장군은 이극장에서 수위장을 하게
되었다고 해요..

극장의 연출가 내외가 조선의 영웅과 이름이 같은
극장의 수위에게 "홍범도 장군과 이름이 똑같으시네요?"
하고 문자 자신이 바로 그 홍범도라고
대답하셨다고 하지요..

깜짝 놀란 연출가는 홍범도 장군의 일대기를
기록했고 이를 연극으로 만들어서 실제로 연극을
하게 되었고.. 수위복을 입은 홍범도 장군이
이 공연을 지켜보시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홍범도 장군은 해방을 2년 앞둔 1943년 쓸쓸히
카자흐스탄에서도 돌아가셨고 그의 마지막 유언은
"언젠가 독립된 조국에 묻히게 해 달라"라는
것이었습니다.

태어나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9살 때
돌아가셨고... 아내는 남편을 회유하라는
일본의 협박을 거부하고 고문 중에 돌아가셨고
두 아들도 항일 투쟁 중에 잃은 홍범도 장군은
홀로 쓸쓸히 카자흐스탄에서 돌아가시게 된
것이 였습니다..

그리고 100년의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오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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