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중일전쟁 상하이전투, 우쑹전투 ! 중국의 각성과 바보짓..

기차타고시베리아 2021. 9. 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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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의 시작 중일전쟁


일본에 있어서 태평양 전쟁의 시작은 1937년
입니다. 흔히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일본군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바로 중국이었지요..
이때부터 일본은 계속 전쟁이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의 일본군 사망자 100만 명 중 절반이
중국 땅에서 죽었고 1943년 중반까지 일본군
예산의 절반 이상이 중국에 투입되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일본국의 주 전선은 중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일본은 이러한 무모한 전쟁을 시작한
것일까요? 애초에 일본군은 중일전쟁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었던 것이었어요. 3개월 안에
중국을 점령하겠다는 호언장담이 결국 일본군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1937년 중국의 장제스는 장시성 루산에서
루산 국방회의를 열고 중국의 주요 인사 들과
현 상황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는데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루산 담화'입니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 전 민족의 생명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철저히 희생하고 철저히
항전할 뿐이다"

장제스의 결의는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중국은 더 이상 일본에 끌려다니지 않고 전쟁을
하기로 결정을 한 것이었습니다,

루산에서 담화를 발표하고 있는 장제스

중국의 각성! 우쑹(오송) 전투


루산 담화 직후 중국군은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웠고 그런 중국군을 보면서 일본군은
관동군이 일으킨 루거우차오 사건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고 3개 사단을 중국으로 증파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일본 군부가 3개월로 봤던 중일전쟁은 점점
진창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독일식 무기와 교육을
받았던 장쉐량의 88사단에 한번 큰 곤욕을
치렀던 일본군은 다시 한번 독일식 사단을
만나게 된 것이었는데요..

일본군은 이제까지 만만하게 봤던 당나라 군대가
아닌 진짜 중국군과 전투를 치러야 했습니다


상하이에 2개 사단을 증파하기로 한 일본군은
상하이 우쏭만에 일본군 3사단과 11 사단을
상륙시키기로 하였는데요..

3사단은 사단 구성원의 96%가 전투불능에 빠졌고
11사단도 일주일 만에 4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한 달되에는 1만 명의 병사를 잃게 됩니다.

이는 장제스가 초빙한 독일 고문이었던
'알렉산더 폰 팔켄 아우젠'의 공로였는데요..

독일군 장비와 독일군 편제로 독일군 훈련을 받고
독일 고문관의 전략까지 맞물린 중국군은
이전의 중국군이 절대 아녔습니다.

3만 명으로 충분히 중국을 상대할 수 있을 것
이라 생각했던 일본군은 중국의 독일식 사단의
벙커와 철조망 뒤에서 잘근잘근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쏭에 상륙하는 일본군

일본군은 황급히 병력을 차출해 상하이 전선으로
보냈는데요 결국 일본은 상하이 전투에
10만 명의 병력을 밀어 넣어야 했습니다.

일본이 상하이에서 허우적 대는 모습을 본
장제스는 상하이 전투에서 모든 것을 걸고
일본군과 결전을 치르기고 결단을 내렸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상하이로 집결시켰습니다.

일본군과 중국군은 상하이 우쏭만에서
결전을 치러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중국의 능력 부족 바보짓


중국군 80만이 상하이에 집결해 일본군과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병력으로는 일본군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만큼
대단위 병력을 투입하고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중국군에는 없었던 것이었어요..

상하이 인근 밀집된 지역에 너무 많은 병력이
빽빽이 밀집해 있었고 병력들도 무질서하게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너무 좁은 지역에 밀집해 있다 보니 일본 해군의
함포사격 한 번에 1대 대대가 전멸하는 이상한
상황이 발행하기도 하였다고 해요

상하이 전투 중국군 참호

이런 상황에서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이 속속
집결하면서 중국군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독가스를 뿌리며 다창전을
함락하면서 상하이를 외곽으로부터 포위해 들
었습니다.

결국 장제스는 1937년 10월 26일 상하이에서
전면 퇴각을 결졍하는데요.. 퇴각하는 순간에도
독일식 사단은 맹위를 떨치며 끝까지 일본군을
괴롭혔다고 해요..

그리고 이러한 상하이에서의 처절했던 전투는
일본군의 머릿속에 악몽 같은 기억으로 남게 되었고
일본군은 12월 13일 중국 수도인 난징을 점령
하자마자 무려 30만의 중국인을 학살하였습니다.

바로 난징대학살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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