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 ( 무열왕 ~ 혜공왕)
앞서 이야기한 박혁거세가 신사를 세우고 진덕여왕이 마지막으로 성골 출신의 왕으로
재위했을 때까지를 신리 전체 역사에서 상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최초로 진공출신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이 된 이후 그의 자식들로 이어지는
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효소왕, 성덕왕 , 효성왕, 경덕왕 , 혜공왕 까지를 중대라고 합니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 ) 654-661
백제의 공격을 받은 신라의 김춘추가 처음 찾아간 곳은 고구려의 연개소문 이었는데요..
연개소문은 이번 기회에 신라를 통째로 먹어버리려고 했습니다.
간신히 고구려를 도망친 김춘추는 다음 '왜'나라를 찾아가지만 왜 나라는 이전부터
백제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신라를 도와줄 수 없었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아간 당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안시성에서 쓴맛을 보고 돌아와
어떻게는 고구려를 끝장낼 궁리를 하고 있었으니 신라와 손을 잡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당연합을 통해 김춘추는 삼국통일의 기틀을 닦고 진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었으니 바로 태종무열왕 입니다.
문무왕 ( 661-681)
태동 무열왕의 아들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완수하고 한반도에서 야욕을 들어내던 당나라를
몰아내면서 이 땅에 최초로 통일 왕조를 이루게 됩니다.
당나라는 신라와 더 싸울 수 있었지만 서쪽의 토번(티베트) 국의 침공으로 인해 동쪽의 한반도에
군사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 것이었지요..
문무왕은 이후에도 왜 나라가 계속 신라를 공격하는 것을 걱정해 자신이 죽으면 동해바다에
묻어 달라고 했는데요..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였다고 해요.. 그리고 경상북도 경주시 봉길리
봉길 해수욕장에 위치한 작은 바위섬이 신라 문무왕의 왕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문왕 ( 681-692)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 김흠돌의 난을 제압하면서 전쟁 공신들을 숙청하고 강력한
왕권을 만들어 냅니다.
신문왕은 신사들에게 땅을 주던 녹읍을 없애고 직접 곡물을 주는 관료 전을 맏들었구요
나라를 9주로 나누고 5개의 작은 수도 5 소경을 두었습니다.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국학도 신문왕때 만들어졌는데요.. 신문왕이 만들어 놓은 강력한
토대를 중심으로 이후 왕대에서 신라는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효소, 성덕, 효성, 경덕, 혜공왕 ( 702~780)
신문왕의 아들 효소왕이 그의 아들 성덕왕 시절에는 신라가 가장 태평했던 시기로
알려져 있는데요..
성덕왕 때는 통일전쟁 이후 나빠졌던 당나라와의 관계로 덤점 회복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하대 ( 780 ~ 935 )
가장 태평하고 번성했던 120년의 전성기를 지나고 혜공왕이 피살당한 이후 신라의
왕권이 점점 무너 저 가는 150년을 하대라고 합니다.
780년 선덕왕,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 현덕왕,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 왕위에 올랐으며
887년 진성여왕부터 마지막 경순왕까지 150면 동안 20명이 왕위에 오르며
신라 왕실을 어지러운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진성여왕이 즉위할 당시 신라는 지방호족들이 자립하고 반란세력들이 차츰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참고로 이때 서양은 어두운 중세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는데요.. 서로마 제국 멸망돼
세워진 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 서프랑크, 남프랑크 왕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통일신라의 멸망 ( 897 ~ 935 )
51대 진성여왕이 897년 돌아가실 당시 신라는 이미 패망이 길을 걷고 있었는데요..
이후 52대 효공왕 당시 후백제와 후 고구려의 공격에 시달리게 됩니다,
53대 선덕왕 때였던 916년 견훤에게 대야성을 공격당하고 54대 경명왕 때 신라는
국력이 쇠태해 경주만 다스리게 됩니다.
그리고 55대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요..
이후 927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935년 자진해서 나라를 고려의 왕건에게
바치며 항복을 하게 됨으로써 찬란했던 신라의 역사는 끝이 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