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한국사 아는척하기 ( 이땅의 사람들)

궁예는 정말 폭군이였을까..?

기차타고시베리아 2023. 2. 11.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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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신라 왕족



궁예는 신라의 왕족이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 왕족이었는지 아니면 궁예가 지어낸 이야기
인지는 확실 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알려진 이야기로 는 궁예는 5월 5일 단옷날 왕족으로 태어났다고.... 궁예가
태어나는 날 하늘에 신비로운 빛이 일었고 신생아의 입에 이가 돋아나 있었다고 해요

왕은 신하에게 이게 좋은 징조인지 물어봤지만 애석하게도 신하는 아이가 자라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는 나쁜 징조라고 이야기합니다.

궁예
어린 궁예 / KSS 드라미 태조왕건 화면 캡쳐

왕은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하지만 던저진 아기를 유모가 간신히 살려냈는데요.. 이때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눈을 실명했다고 해요..

유모는 궁예를 데라고 도망가 살았고 이 내용을 나중에 알게 된 궁예는 신라 왕실에 복수를
다짐하게 됩니다.




후고구려 궁예 등장



궁예는 강원도에 있는 세달사라는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는데요.. 그래야만 신분을 감추기도
좋고 먹고살 걱정도 안 해도 되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그 시절 몰락해 가는 신라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는데요..
궁예는 지금의 원주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양길을 찾아갑니다.

양길
양길 / KSS 드라미 태조왕건 화면 캡쳐


양길에 의탁한 궁예는 훌륭한 지휘관이었습니다. 병사들과 같은 이불을 덮고 자고 같은 음식을
먹었으며 상이나 벌을 줄 때도 차별을 하지 않았다고 해요..

궁예는 경기도 북부 지역을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901년에는 지금의 개성인 송악에 나라를
세웠으니 바로 후고구려 되시겠습니다.

그리고 궁예가 송악에 자리를 잡았을 때.. 송악의 거상이었던 왕건의 아버지는 지역을 궁예에
바치고 아들을 안건을 그의 부하로 들여 보닙니다.

나주정벌
나주정벌에 나선 궁예 / KBS 역사스페셜 화면 캡쳐



궁예와 왕건은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차례차례 정복하면서 힘을 키웠는데요,, 특히 왕건이
나주를 정복하면서 견훤의 후백제를 밀어내고 넓은 영토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남 강진 무위사에 세원진 선각대사비에 따르면 나주를 공격한 것은 왕건이 이나고
궁예가 직접 나서 정복했다고 나와 있다고 하는데요..

이 말이 사실이면 후삼국 통일의 핵심인 나주공략의 주역은 궁예였고 고려시대 이를 왕건의
업적으로 바꾸면서 통일의 주역을 바꾼 것이 되어 버립니다.

미륵불 궁예의 관심법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기록상 궁예가 갑자기 이상해지기 시작하는데요..

905년 갑자기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기고 아주 화려한 궁궐을 지었고요.. 고려란 이름도
버리고 '마진'이라고 했다고 '태봉'으로 다시 바꾸었습니다.

고구려를 그리워하며 궁예를 따랐단 사람들에게는 배신감을 심어주게 된 것이었어요..

궁예
궁예 / KSS 드라미 태조왕건 화면 캡쳐


여기다 자기 스스로를 미륵불 이라면서 신처럼 행동했는데요.. 궁예가 궁궐 밖으로 나갈 일이
생기면 자신은 금빛 모자를 쓰고 은, 비단으로 꾸민 흰색 말을 탔고요..

앞에는 깃발을 든 소년과 소녀를 앞장 세웠고 뒤에서는 200 명의 승려에게 부처를 찬양하는
염불을 외우게 했다고 합니다.

궁예
관심법  / KSS 드라미 태조왕건 화면 캡쳐


궁예의 기행의 최고봉은 바로 관심법인데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조.

궁예는 관심법을 사용해 자기한테 나쁜 마음을 품는 사람을 골라내 처형했고 자기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부인과 두 아들까지 죽여 버렸습니다.
.

궁예
궁예의 죽음 / KSS 드라미 태조왕건 화면 캡쳐


점점 심해진 궁예의 의심병에 나라가 휘청거리게 되자 장수들과 신하들은 왕건에게 반란을
획책했고 왕건은 고심고심 끝에 이를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는 것이 고려의 기록입니다.

드라마에서 궁예의 마지막 가는 길은 왕건이 찾아가 술잔을 나누고 담소를 나누고 병사의
칼에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나오는데요..

사실 고려사에 따르면 왕건의 반란을 피해 도망친 궁예는 병사들을 피해 몰래 도망 다니던 중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보리이삭을 훔쳐먹다 부양 백성에게 살해되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승자의 기록



하지만 문제는 궁예에 대한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쓰인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쓰여진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둘 다 왕건에 초점을 맞춘 역사서 지요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세운 나라 고려였으니 왕건이 궁예를 몰아낼 수밖에 없었다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궁예를 미친 사람처럼 만들어야 했을 수도 있거든요..

선각대사바궁예
무위사  선각대사비 / KBS 역사스페셜 그날 화면 캡쳐 


실제로 왕건이 고려를 차지한 이후에도 궁예를 따르던 사람들이 왕건을 인정할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키고 후백제로 도망친 사례가 많다고 합니다.

송악에서 자리를 잡고 그 지역 호족들과 연합을 했지만 어느 정도 나라의 자리가 잡힌 후에는
호족들이 궁예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했을 테고..

이런 호족들의 도전으로 인한 혼란의 싹을 제거하고자 궁예는 부인과 아들을 죽이는 강수까지
두지만 실패하였고 결국 역사서에 미친 사람으로 기록되고 말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결국 자기도 호족출신 이었던 왕건은 궁예보다 호족을 다루는데 한수 위였던 것이였는데요.
이렇게 역사는 다시 승자의 기록으로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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