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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일본의 성장과 몰락 54

스탈린의 외교감각과 일본이라는 카드

노몬한 전투 후 소련과 일본의 입장 노몬한 전투이후 일본은 심각하게 소련의 위협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군부의 남방공력파와 북방공략파는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었지요.. 일본 군부에서 이제 소련과 싸우겠다는 말은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앞으로 일본이 싸워야 하는 쪽은 북쪽이 아니라 남쪽이라는 것을 한방 세게 얻어 맞고 확실하게 알아버린 것이었어요 일본이 소련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확률은 0%에 가까웠습니다. 거기다 1939년 동맹인 독일이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소련과 사이좋게 폴란드를 나눠 먹어 버렸으니 일본은 이제 동맹에 기댈 수도 없었습니다. 남은 방법은 어떻게든 소련에 들러붙어 구애해서 불가침 조약을 맺는 것뿐이었어요... 일본은 몸이 달아있는 상태였는데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함에 따라 무주..

일본관동군, 만주국, 몽골 그리고 소련. (노몬한 전투)

만주국과 몽골 1932년 일본이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우자 소련은 심기가 불편해졌습니다 '만약 일본이 독일과 손잡고 양면에서 공격해 들어온다면 소련은 이를 어떻게 막내야 할까.?' 이러한 고민 끝에 눈에 들어온 것이 것이 바로 근대국가로 재탄생한 몽골이었습니다. 러시아의 반혁명 분자였던 '운게른 남작'이 혁명 세력에 패퇴한 뒤 몽골로 피신했고 몽골은 운게른 남작의 도움으로 독립을 선포하면서 300년 동안 이어져온 청나라의 지배에서 벗어 나게 되었는데요.. 몽골의 지정학적 위치가 절묘하게 애매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만주국이란 괴뢰국을 만들었고 그 여세를 몰아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중국과의 전쟁이 정리되면 병력을 모아 러시아로 쳐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 상황이었는데요.. 일본 관동군이 세운 만주국은 ..

국제연맹에서 삼국동맹으로.. 독일과 친해진 일본

국제 미아가 된 일본 중국이 장기전으로 태세를 전환하는 것을 본 일본은 '거국일치'라고 말하며 전시체제로 국가체계를 개편을 했습니다. 워싱턴 해군 조약 탈퇴, 국제연맹 탈퇴로 국제사회에서 멀어진 일본은 이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야 했는데요.. 아무래도 정치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명분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를 통해 국민들을 설득 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동아공영권 이였어요..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1년이 지난 1938년 '고노에 후미나로' 수상은 동아협동체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동아영원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신질서의 건설이 이번 전쟁의 목적이다. 일선은 일본의 촉구 정신에 연원 하며 이를 완성하는 것은 일본 국민에게 지워진 영광스러운 책무이다" 간단히 말해 동아시아 지역적 운명공..

난징대학살 원인, 진행과정. 반성없는 뻔뻔한 일본 (혐사진 없음)

난징대학살의 원인 상하이 전투에서 10만의 병사를 잃고 어렵게 승리를 거둔 일본은 1937년 12월 13일 수도 난징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악몽같은 전투를 치르고 난징에 입성한 일본군은 사람이 아닌 악귀였습니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하였고 이로 인해 30만여 명의 중국인이 무참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난징 대도살'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난징사건'이라고 부기도 하고 서구에서는 '아시아의 홀로코스트'라고도 합니다. 이유는 앞서 얘기한 대로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친 일본군은 중국의 독일식 사단의 참호 앞에서도 닥치고 돌격을 외치며 공격하다가 심한 피해를 입었고 이로 인해 중국..

중일전쟁 상하이전투, 우쑹전투 ! 중국의 각성과 바보짓..

태평양전쟁의 시작 중일전쟁 일본에 있어서 태평양 전쟁의 시작은 1937년 입니다. 흔히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일본군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바로 중국이었지요.. 이때부터 일본은 계속 전쟁이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의 일본군 사망자 100만 명 중 절반이 중국 땅에서 죽었고 1943년 중반까지 일본군 예산의 절반 이상이 중국에 투입되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일본국의 주 전선은 중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일본은 이러한 무모한 전쟁을 시작한 것일까요? 애초에 일본군은 중일전쟁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었던 것이었어요. 3개월 안에 중국을 점령하겠다는 호언장담이 결국 일본군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1937년 중국의 장제스는 장시성 루산에서 루..

대동아공영권의 탄생. 전쟁으로 달려가는 일본

대동아공영권 서구 열강 중심의 국제사회에서 탈퇴를 선언한 일본은 그들만의 새로운 논리를 들고 나왔는데요 "서양 중심의 국제질서에 언제까지 끌려다닐 수 없으니 아시아로 회귀하자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범아시아주의, 흥아론의 시작이었습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아시아 각국에서도 어느 정도 호응을 얻은 이 이론은 일본 단독으로 서구에 대항하기는 무리이므로 중국과 조선이 서로 연대해 서양세력에 대항하자는 것이 주요 골자였고 조선의 김옥균도 이 사상에 동조를 하기도 했었지요.. 고노에 우미마로 수상은 1940년 시정연설에서 "천황을 위해 전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만들자" 라고 말했는데요.. 한마디로 세계 정복 하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원래 세상은 천황과 천황이 사는 일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중일전쟁의 시작. 루거우차오 (노구교) 사건.

중국 반일감정 격화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이에 대해 중국은 국제연맹에 이를 제소하였고 1933년 실사 조사단의 조사 후 만들어진 "리튼 보고서 채택에 반대를 표시하고 국제연맹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 일본 대표 마쓰오카 요스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나라에나 양보도 타협도 할 수 없는 사활적 문제가 있는데 일본에게는 바로 만주가 일본인의 생사가 달린 양보할수 없는 문제다" 이후 일본은 국제연맹가 워싱턴 조약에 차례로 탈퇴하며 전쟁으로 내달리게 되는 것이지요.. 1931년 만주국이 세워진 이후로 중국 동북지역에서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중국 내 항일 운동이 거세게 확산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총통 장제스는 먼저 내부의 공산당을 정리하고 일본에 대응..

홍범도 장군의 귀환 (2).자유시 참변, 러시아 내전, 카자흐스탄

한 곳에 모여든 독립군 간도 참변 이후 간도를 떠난 독립군들은 1920년 12월 밀산 한흥동에 도착을 합니다. 서일이 총재로 김좌진 장군이 사령관으로 있던 북로군정서를 중심으로 1만의 대한독립군단이 밀산부 한흥동에 모여 있을 때 러시아 볼셰비키 측에서 독립군에 제안을 하게 됩니다. 러시아는 군량미도 기지도 무기도 변변치 않은 대한독립군단에게 러시아로 건너오면 자신들이 지원을 하겠으니 여기서 일본과 싸우자는 제안 을 하게 되었는데요.. 이때 대부분의 독립군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흩어져있는 독립군들이 한데 모여 통합을 해보자는 취지로 러시아으로 넘어가게 되고 그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자유시 였던 것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당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혁명을 성공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나 기존의 제국주의 세력들과..

홍범도 장군의 귀한 (1).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간도참변,대한독립군단.

장군의 귀환 2021년 8월 홍범도 장군의 위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되면서 홍범도 장군은 78년만에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동안에도 홍범도 장군의 위해 봉환을 시도 했었던 적은 많았지만 북한측에서 고향이 평양지역이였던 홍범도 장군이 남한으로 봉환 되는것을 반대 하였고.. 남한 내에서도 당시 소련에서 돌아가신 홍범도 장군이 사회주의자 계열이였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해요.. 홍범도 장군의 귀한을 맞아 그분의 발차취와 당시 항일 무장투쟁의 상황을 찾아 보았습니다. (주된 내용은 역사강사 황현필 선생임의 유트브 강의를 참조하였습니다 )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전승국으로써 대한민국에 대한 수탈을 이어가고 있을때.. 국내에서의 항일 투쟁도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는데요.. 1919년 ..

만주사변 ! 만주국이 만들어진 이유 ( 마지막 황제 )

1929년 불어닥친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에도 실업자가 넘쳐났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헤매게 되었습니다. 나름의 민주주의 형식을 갖추고 위싱턴 군축 조약으로 군비를 삭감하고 이렇게 확보한 재정으로 산업발전에 투자하고 악화일로를 걷던 세계 열강과의 화해분위기로 발전을 이루고하 했던 노력들은 수폴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결국 일본은 전쟁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 합니다. 만주사변 1930년 말 만주에 체류하는 일본인은 22만명에 달했는데요..당시 일본 육군은 일본 농촌을 중심으로 만주로 이주하자는 캠패인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만주에는 기름진 평야가 있으니 어차피 경제도 어려운데 일본에서 굶어죽느니 만주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보자~" 라는 선동이였지요.. 물론 여기에는 만주를 완전히 확보하기 위한 의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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