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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111

그레이트 게임 (Great Game) : 영국 VS 러시아 그리고 거문도사건

러시아는 16세기에 이미 시베리아를 넘어 태평양 연안까지 국경을 넓혔고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해 청나라와의 국경선을 확정 지어 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얼지 않은 항구 '부동항' 이 없었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이때 영국이 인도를 차지하였는데요.. '해가 지지 않은 대영제국 황제의 왕관 한가운데 빛나는 보석'이라고 할 만큼 영국에게는 로또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인도는 영국에서 엄청난 부를 가져다 주었는데요 인도에서 무한정 생산 되는 목면을 가져와 맨체스터의 방직공장에서 면직물을 생산하였고 이를 다시 인도에 가져다 파는 형식이었습니다. (나중에 인도의 간디가 직접 물레를 돌렸던 이유가 바로 직접 면직물을 만들어 쓰자는 것이었어요..) 세계 각국에서 인도에 도전하였지만 바다를 ..

일본은 본질적으로 야만(野蠻) 입니다. ( 토지의 박경리 작가님)

"일본은 야만입니다. 본질적으로 야만입니다. 일본의 역사는 칼의 역사일 뿐입니다. 칼싸움의 계속일 뿐입니다. 뼈속깊이 야만 입니다 " 박경리 작가님과 도올 김용옥 님의 대화중에서 일본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이때 박경리 작가님이 일본에 대하여 설명한 부분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교육을 받은 지식인 ! 누구보다도 많은 양의 일본 작품을 접한 박경리 작가님이 자신만의 생각으로 일본에 대하여 분석을 한 것이였는데요.. 점더 두분의 대화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위에 "야만" 발언이후 박경리 : 김선생! 일본을 긍정적으로 볼려면 반드시 실패 합니다. (처음의 야만 발언) 도올 : 아니 그래도 일본에서는 이미 나라, 헤이안 시대 부터 여성적이고 심미적인 예술성이 퍽 길게 발달하지 않았습니까? 노리나가가 말하는..

삼국간섭 과 을미사변 ! 그리고 일본의 각성

1895년 4월 일본은 시모노세끼 조약으로 중국 랴오둥 반도를 얻음으로서 본격적으로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 하였습니다. 그러데 조약 체결 6일 후 러시아, 독일 , 프랑스 공사는 일본 외무성을 방문해 " 랴오둥 반도(요동반도)를 일본이 소유하는 것은 청나라 수도에 대한 항구적인 위험일 뿐만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것" 이라는 의견을 전했는데요.. 이 사건이 바로 '삼국간섭'입니다. 일본 외무성.. 아니 일본 전체가 이에 매우 당황하고 분노한건 당연했겠조.? 러시아는 만약 일본이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을 차지할 경우 청나라와 연합해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러시아는 급하게 프랑스와 독일을 포섭했고 세 국가가 일본을 압박한 것이었죠.. 일본 전체..

청일전쟁과 한반도 ! (시모노세키 조약의 의미)

"한반도는 일본을 겨눈 비수와 같다" 일본 육군대학에서 장교들을 훈련시킨 독일은 '클레멘스 빌헬름 야콥 메켈' 소령은 파견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뼈있는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육군대학은 조슈번 출신이 장악한 육군의 엘리트 양성 코스였는데요.. 독일의 육군대학을 모방한 일본 육군대학은 미래의 엘리트 간부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는데요.. 이때 파견된 메켈 소령은 일본 육군의 기틀을 잡은 사랍이었습니다. 이런 메켈 소령이 한반도를 비수라고 평가 했었던 것이었습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성공적으로 근대로 넘어간 일본은 한반도를 눈길을 돌렸는데요.. 메켈 소령의 이 한마디는 더욱 일본이 한반도에 집착을 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은 청나라가 가장 크게 가지고 있었..

드디어 메이지 유신 , 그리고 이와쿠라 사절단.

사카모토 료마와 삿초동맹에의해 에도막부의 시대가 막을내리고...일본은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200여 여개의 지방 번들은 다이묘들이 직접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번들은 독자적인 재정으로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고 무사들은 여전히 급여를 받고 있었어요. 사쓰마, 조슈의 젊은 무사들이 주축이 된 삿초동맹과 메이지 정부는 권력을 중앙에서 장악해야 했었는데 그러려면 다이묘들이 아닌 중앙에서 파견한 공무원들이 직접 세금을 징수하고 관리해야만 했습니다. 덴노는 번을 폐지하고 현 행정구역을 설치하려고 했는데요 이렇게 하려면 모든 토지와 백성은 모두 덴노에게 반납되어야 했어요. 다이묘들은 토지와 농민을 모두 덴노에게 반납하는 대신 거액의 보상금을 받고 자기가 다스리던 지역에서 나오는 세금의 10%..

이시국에 일본 근대사에 관심이 가는이유..(국제정치의 냉혹함)

요즘 일본이 근대화로 성장하게 되는 상황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몰락해가는 과정에 대해 나름대로 알아보고 포스팅을 이어나가 려고 하고 있는데요.. ^^ 그 이유 중 첫 번째는 일단 재밌습니다. 일본이란 나라 참 재밌는 나라인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것들을 보면 '얘네들은 도대체 왜 이러나..' 싶기도 한데요.. 관련 자료들을 읽다 보면 우리 조선시대와 비교도 되고.. ' 왜 이런 놈들이 그 당시 동아시아에서 혼자 잘 나갔을까? ' 궁금증도 조금씩 풀리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이과 정들을 따라가다 보면 정말 국제정치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실감하게 됩니다. 몇 년 전 유튜브에서 도올 김용옥 선생이 아주 오래전 강연했던 '동아시아 30년 전쟁'이라는 강연을 본 적이 있었는데요.. 저에게..

사카모토 료마의 삿초동맹과 도쿄의 탄생

1856년 중국은 2차 아편전쟁에서 또다시 패배하면 서 굴욕을 당하게 되고 이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미국은 겁을 먹은 일본에게 새로운 조약을 맺도록 강요했고 1858년 미일 수호통상조약 이 맺어지게 되는데요.. 이에 질세라 영국, 러시아 , 프랑스, 네덜란드도 새롭게 일본과 통상조약을 맺었습니다. 웬만하면 그냥 다 들어준 것이었어요.. 이를 지켜본 웅번들은 '무능한 막부가 일본을 망하게 하고 있다'라고 하며 막부에게 빼앗긴 정권을 덴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막부와 웅변의 대결이 시작되었고 1858년 사쓰마와 조슈 등 웅변의 인사 100명이 막부에 의해 처형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요 '안세이 대옥'으로 불립니다 웅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

웅번의 성장과 일본개항 쿠로후네 사건.

겐로쿠 호황의 시대를 지낸 일본은 이대로 계속 발전할 것처럼 보였지만 잦은 자연재해와 기근으로 인해 농민반란이 일어나는 등 문제가 자꾸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자연재해로 쌀값이 폭등하면 조닌 계급의 계급의 삶이 힘들어졌고.. 월급을 쌀로 받아 돈으로 바꾸어 생 활을하던 무사계급은 반대로 쌀값이 떨어지면 살기 힘들어지게 되었거든요.. 막부의 쇼군과 지도자 들은 이런 상황을 이겨 내고자 여러 가지 정책들을 시행하면서 성장과 정체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다 1833년 집중호우와 냉해로 또 다시 식량부족에 직면한 일본의 농민들은 봉기를 일으키게 되는데요 당시 매일 200 명씩 죽어나갔다고 해요.. 이때는 무사들까지 반란에 합류하게 되는데..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막부는 엄격한 풍속 통제와 물가 통제를 이어..

일본 에도시대 상업의 발전과 퇴폐적문화.(겐로쿠 시대)

일본에서 상공업자들을 조닌이라고 불렀는데요.. 처음에는 무사계급에게 물품을 대줄 목적으로 성안의 좁은 쪽방에서 살던 조닌 계급은 에도시대 상업의 발전으로 엄청난 부를 쌓고 일본 사회에서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메이지유신'이후에는 유럽의 부르주아와 같이 무사계급을 뒤집고 사회의 주도권을 잡게 되기도 하지요.. 아무튼 일본은 에도시대로 들어오면서 오랜 기간 평화가 지속되었고 무사보다는 상인들의 세력이 점점 커져가게 됩니다. 일종의 인질 제도였던 참근교대제로 에도에 들어와 있던 무사들은 직접 밥을해 먹지 않았으며 집들이 바짝 붙어있는 에도의 주거지 특성상 집에서 불을 피워 음식을 해먹지 않았는데요.. 이들이 밖에서 음식을 사먹게 됨에 따라 음식점, 포장마차, 노점상들의 영업이 성업을 ..

일본 에도시대.. 17세기 일본 발전의 계기.

일본은 어떻게 조선을 침략하고 아시아를 식민지화 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부를 축적해서 아시아에서 제일먼저 근대화에 성공할수 있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여러가지를 한번 찾아봤습니다. 일단 일본의 당시 통치체재는 막번체제였어요. 허울뿐이던 일왕의 위임을 받아 일본을 통치하는 대장군을 쇼균이라고 하였고 쇼균이 있는 곳을 막부라고 하였지요.. 그리고 쇼군에게 영지를 하사받아 그 지역을 다시리는 사람을 '다이묘' 그 땅을 '번' 이라고 했었으니 이 체제가 막번체제 인데요. . 사실 에도(지금의 도쿄) 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가문을 견재하고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에도로 몰아내면서 도구카와 가문의 영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에도는 비만 오면 강이 범람을 했고 해안은 뻘밭이 길게 늘어서 있어..

역사 이야기 2021.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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